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도서출판 이산, 2009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일본의 역사에 기대고 있는 점이 많은데, 그중 가장 뼈아픈 것중 하나가 일본의 번역 문화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식민지화 과정을 통해 서구 문명과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슬픈 역사적 사실을 뒤로 하고서라도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과연 일본의 메이지 시대만큼이나 번역에 대해 신중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했는지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한국에서 출판되는 많은 외국 서적들이 일본의 번역 문화를 그대로 한국말로 바꿔치기 하고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최근 일련의 반성과 비판을 통해 한국의 번역 문화도 나름의 정체성을 획득해 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일본의 번역 문화가 세부적으로 어떤 역사점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 반면교사의 자세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분명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일본의 두 석학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책은, 일본근대사상대계 프로젝트의 일환인 <번역의 사상> 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기록된 담화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담화의 목적은 몸이 불편한 마루야마 마사오의 집에 가토 슈이치가 찾아가 문답을 통해 책의 일부분을 완성하는 것이었으나 단순한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두 석학이 적극적인 토론을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학문적 탐색을 진행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 몇가지를 기록하고자 한다.

첫째, 메이지 유신 이전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타국의 문화를 ‘다름’ 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750년경, 그러니까 에도시대부터이다. 그 전까지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중국문화조차 다른 문화로 인식하지 않았다. 때문에 ‘사전’ 따위의 서적이 존재할리 만무했으며, 세상에는 오직 일본어만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규 소라이등의 유학자들에 의해 비교 언어학/ 비교 문법학이 비로소 출발하게 되고, 다른 ‘문화’ 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페리호 사건등을 통해 강제적인 개항이 이루어 진 뒤 일본은 철저하게 서양문화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한다. 책의 저자들은 서구 서적에 대한 번역은 이러한 따라잡기 과정의 일환으로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중국과 아주 오래전부터 교류해 왔지만 실질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던 반면, 서구 문명은 아주 짧은 시기에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그 존재를 각인시켰다. 일본은 중국을 가깝지만 존재하지 않는 타자로 인식한 반면 서구 문명은 멀지만 실재하는,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타자로 인식했다. 적극적인 번역의 움직임은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메이지 시대 초기의 번역은 크게 세가지 방법으로 이루어 졌다. 이 시대의 번역은  중국의 한자 문화권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데, 초기에 가장 널리 쓰였던 방법은 기존에 사용하던 한자를 조합해 번역에 재사용하는 것이다. 둘째 방법은 이전에 사용하던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되 그 의미를 달리 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신조어를 새롭게 창조해 내어 번역에 응용하는 것이다. 메이지 10년 전후로 첫번째 방법에서 두번째, 세번째 방법으로의 전환이 급격하게 일어나는데 이를 책에서는 중국문화로부터의 실질적인 독립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본은 개항 이전까지 철저한 유교 문화권 아래 있었고, 때문에 번역 과정에서 서구문명의 완전히 새로운 개념들을 받아들이는 데에 애를 먹었다. 예를 들어 society 를 초기에는  ‘정부’ 로 번역했다가 시간이 흐른뒤에야 비로소 ‘사회’ 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이는 메이지 이전 일본에 ‘사회’ 라는 서구식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마루야마는 일본에는 없고 서구 사회에는 있었던 중요한 두가지 개념으로 ‘인민 독립의 정신’ 과 ‘과학관’ 이라고 지적한다. 때문에 ‘민권’ 이라는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영,미,독의 법조항들을 번역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고, 이 과정을 극복하면서 급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에 있어서도 특히 화학쪽에 대한 번역이 활발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주력 수출 품목이 섬유업이었다는 점에서 바라봐도 흥미롭고, 일본이 기대고 있던 유학의 음양오행설에 전적으로 반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도 재미있다. 즉 성분과 성분을 결합해 새로운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 진 것이다. 뒤이어 수용하게 되는 다윈의 진화론이라던가 원자설같은 것도 같은 논리.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의 식자층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점이다. 즉 사람들은 한자를 읽지는 못해도 일본어는 읽을 수 있는 수준은 대부분 갖추고 있었고, 번역 출간이 본격화되면서 영일 사전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즉 짧은 시간에 일본인들은 서구 문명에 대한 이해를 급격하게 높일 수 있었고, 당시로선 대단히 충격적일 수 있었던 많은 이론들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결과로 계층간 갈등도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좋은 예로는 서구 사회에 존재하지 않던 무사 계층이 번역의 확대로 인해 실제로 소외받게 된 것이다. 메이지 체제는 번 체제를 현 체제로 전환하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지만 무사 계층을 없애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리고 번역 초기 아직 남아있던 ‘국체론’ 이 서서히 쇠퇴하고 개개인에게 각각의 권리가 있다는 계몽 운동이 서서히 활발해 지는 것도 일정 부분 번역의 영향권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2007년 계절학기로 한국현대사를 수강하던중 강사분께 이 책을 추천받고 그 뒤로 계속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겨우 읽게 됐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를 구할 수 없는데 만약 구할수만 있다면 흥미로운 리서치 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번역 문화와 사회적 변화를 계량적으로 풀어내는 시도가 전에 있었나 싶다.

6 thoughts on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1. 상당히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근대화의 과정에서 번역이 했던 역할을 조명하는 내용이 인상깊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용이 정확하게 생각이 안 나니 다시 읽어봐야겠군요. ㅎㅎ

    • 책이 나온지 좀 됐더라구요. 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미시적인 변화가 거시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부분도 말씀하신 것처럼 인상깊죠.

    • 저에게도 적지 않게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제가 글을 잘 쓰지 못해 더 어렵게 보이지 않았나 싶군요.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2. 이 책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 이산에서 나온 책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한때, ‘근대와 근대성’, ‘형식과 내용’에 빠져 있었던지라. ‘번역’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문화(국가)의 근대화와 긴밀한 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아직 우리에게는 이런 접근이 없지요. 정치적인 문제라고 봅니다만. 저도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

    • 그러셨군요! 저도 한국의 근대화 시기에 대해서는 학부때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대학원에 와서 본격적으로 서구 사회의 근대화를 배우게 되면서 더더욱 그 호기심이 증폭되는 것을 느꼈구요. 언젠가는 꼭 전문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암튼 반가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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