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커피와 별로 친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카페인에 대해 심하게 반응하는 몸뚱아리때문일 것이다. 최악의 경험은 유럽 여행중 24시간을 꼬박 자지 못하고 도착한 빠리에서 외사촌형이 주는 빠리산 에스프레소 한잔 마신 날이었다. 몸은 정말 너무 피곤해 죽겠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한 기분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날이 밝는 것을 지켜 봐야 했다. 그 이후의 일정들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고. 그 이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로도 커피는 입에 대지도 못하고 살아 왔다. 까페가는 것은 좋아하지만 커피는 마실 수 없는 슬픈 운명과도 같은 삶이었다. 대체재로 한국에서는 주로 녹차라떼나 녹차 프라푸치노를 마셨는데, 그것도 미국에 오니 더이상 마실 수 없었다. 파는 곳도 적거니와 설사 발견한다고 해도 달디 단 그들만의 녹차 라떼는 도저히 마실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인들이 커피 한잔 하러 가자고 하면 나는 그곳에서 비싼 생수를 주문하거나 Izze 같은 청량음료를 마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커피에서 카페인을 제거한 decaf 커피의 존재를 알게 됐다. 한번 큰맘먹고 도전해 봤다. 심장이 더이상 뛰지 않았고 잠도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커피 한잔 마시면 그날 늦은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했는데, 디카페인 커피는 그런 효과가 전혀 없었다. 화학 작용을 통해 카페인을 제거하면 몸에 좋지 않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 방법으로 나오는 decaf coffee 도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하지만 디카프 커피에 대한 수요층은 상대적으로 적은 터라 대부분의 까페에서는 딱 한두가지 정도의 디카프 커피만을 제공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커피를 마시는 대부분은 아마 커피의 각성효과를 반기는 입장일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대학원생들이다. 피곤을 몸에 달고 사는 직장인들도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잔으로 피로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커피 상품들이 나와 있다. 생산지에 따라, 로스팅 기법에 따라, 브렌딩하는 방식에 따라 아주 다양한 기호를 만족시킬 수 있는 커피들이 나와 있다. 하지만 디카프 커피 라인은 그렇지 못하다.

굳이 떼를 써가며 디카프 커피를 마셔야 할 이유는 사실 없다. 커피없이도 일평생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커피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한번 마셔보기로 결심한 이유를 두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커피가 주는 향이 좋아서다. 어려서부터 코가 좋지 않아 비염과 축농증을 달고 살았기 때문에 냄새, 혹은 향기에 대한 묘한 집착같은 것이 있다. 좋은 냄새가 나는 음식, 좋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 좋은 향기를 간직한 장소를 좋아한다. 특히 장소와 시간에 대한 기억은 많은 부분이 후각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2001년 광화문의 냄새, 2002년 대학로의 냄새, 2008년 양재역의 냄새, 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커피는 아주 매력적인 대상이다. 코코아나 초콜릿처럼 톡 쏘는 향기로 후각을 마비시키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향기에 익숙해지지도 않게 만든다. 커피가 머그잔에 남아 있는 한 그 향기는 몇시간이고 내내 지속되고, 나의 코는 그 향기를 계속해서 맡게 된다.

다른 이유는 부모님때문이다. 커피 애호가인 부모님은 늘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나를 매우 안타까워(?) 하셨다. 게다가 초콜릿도 먹지 못하니, 군것질을 좋아하는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나는 “세상의 즐거움을 전혀 모르고 살아온” 불쌍한 놈이었다. 여담이지만 최근 크리스도 비슷한 말을 내게 했다. 커피도 못 마시고 초콜릿도 먹지 못한다고 했더니 “그럼 너는 왜 사니?” 라고 하더라.

아무튼, 그래서 오늘 큰맘먹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몇가지 구입했다. 먼저 피츠 커피에 가서 디카프 커피 1/2 파운드를 구입했다. 커피에 대해선 완전히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냥 메뉴판에서 대충 보고 수마트라산을 샀다. 왠지 아시아쪽에서 나는 커피를 먼저 먹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없다. (..) 오늘 나를 위해 수고한 (대학원에 들어온 후 커피 매니아가 된) K 의 말에 따르면 스타벅스는 매장에서 제조한 커피 매출 비중이 큰 반면 피츠 커피는 이렇게 소비자가 직접 타먹을 수 있게 판매하는 커피 매출 비중이 크다고 한다. 물론 검증된 바 없다. 그곳에서 이쁜 머그잔도 하나 샀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딱 내가 좋아하는 그림체. +_+

그리고나서 베드베쓰엔비욘드에 가서 커피 내리는 기계(이걸 커피 포트라고 하나?)를 둘러 봤다. 에스프레소는 너무 독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 딱히 마음에 드는 기계가 없어서 (역시 문외한이기 때문에 기계를 고르는 기준은 ‘얼마나 이쁘게 생겼나’ 였다) 섭섭해 하던 중 K 의 추천으로 French Press 를 샀다. 여기에 커피를 넣고 끓는 물을 부으면 일종의 녹차팩같은 역할을 하는 필터가 지긋이 커피를 눌러 찌꺼기를 제어한다. 내리는 커피와 동일한 효과라고 한다. 단점이라면 타이머같은 기능이 전혀 없고 (그냥 유리 주전자에 필터가 들어가 있는 형태다) 식은 커피를 다시 데필 수 없다는 것 정도인데 내가 커피를 하루에 두세잔 먹는 사람이 아니니까 별 상관없을 것 같아 그냥 샀다.

그리고 간 곳은 타겟. Canister 를 사서 피츠커피에서 산 커피를 보관하기로 했다. 공기와 접촉하면 맛이 변질된다고 하는 말을 듣고 집에 없던 밀폐 용기 하나를 구입했다.

이제 텀블러만 사면 되는데, 텀블러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사기로 했다. K 가 가지고 있는 스타벅스 텀블러가 참 많이 탐이 났는데 (중간 부분이 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잡을 때의 느낌도 좋고 멋스럽다) 똑같은 걸 살수는 없으니 (..) 조금 참아 보기로 했다. 예전에 한참 차를 우려 내어 마시는 것에 꽂혀 있었을 때 샀던 텀블러는 물이 줄줄 새서 이동할 때 사용할 수가 없다.

암튼 그렇게 집으로 와서 구입한 도구들을 이용해 커피를 타먹어 봤다. 커피를 마시면서 인터넷으로 커피의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조금씩 시간을 투자해 공부해 볼 생각이다. 우선 오늘은 로스팅 정도에 따라 풀시티부터 프렌치, 이탈리아 로스팅까지 그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니까 오늘 K가 산 프렌치 로스팅은 단맛이 거의 나지 않고 쓴맛이 주로 나는 로스팅이렸다. 아라비카 커피는 풀시티 로스팅으로 해야 일품인 맛이 나온다고 한다. 뭐가 뭔지 아직 하나도 모르겠다 +_+

일반 커피에서 카페인만 제거했기 때문에 커피의 다른 성분들이 주는 화학적 효과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몸이나 마음 상태가 약간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몽롱해진달까? +_+ 오늘 잠을 제대로 잘 수 있다면, 당분간 새로 산 수마트라 커피를 다 마시는 날까지만이라도 지속적으로 커피에 도전해 봐야 겠다.

8 thoughts on “커피

  1. 전 커피를 엄청 좋아하지만 위장이 약해서 자주는 못 마셔요. 하지만 제 허접한;; 입맛에 따르면 디카페는 조금 맛과 향을 억누른 듯 하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보통 커피보다는 둔한 맛이예요. 물론 커피 콩이 신선하지 않다면 뭘 마시든 마찬가지겠지만. 예전에 자카르타에 갔을 때 막 볶은 커피콩을 좀 사서, 역시 허접한;; 솜씨로 드립해서 마셨는데 꽤 괜찮았던 걸 보면, 역시 음식은 재료가 중요한 듯 싶어요.^^

    • 아하, 그런게 또 있군요. 아무래도 한번 추출하는 과정을 더 겪으니 그만큼 콩의 신선도가 떨어지게 되는 걸까요? 공부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네요. 자카르타에 커피 관광 다녀오신 거예요? +_+ 완전 짱이십니다.

  2. 전 둔해서 디카프와 일반 커피의 차이점을 모르겠던데 차이가 나긴 나는거였군요. 전 커피는 그냥 마시는데 공부까지 하시다니 +_+ 나중에 궁금한거 있음 물어볼게요 ㅎㅎ

    • 녹차를 먹어도 심장이 뛸 정도로 (가끔 콜라에도 반응해요;) 심장쪽이 좋지 않은가 봐요. 둔한게 좋은 거 같은데, 아닌가요? ㅋ 저도 아직 생산지 차이밖에 몰라요 ㅋ

  3. 자카르타 “커피” 관광이라니 그럴리가요. “그냥” 관광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이 커피로 유명하잖아요. 그래서 커피 살 생각을 한 거고.

    • 그러셨군요;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가셨다니, 궁금하네요. 주변에서 좀처럼 거기 다녀 왔다는 얘기를 듣지 못해서요. 지금 제가 먹고 있는 커피도 인도네시아산인듯! ㅋ

  4. 평소에도 공부 많이하는데, 꼭 커피까지 공부해야 직성이 풀리겠어요, 종혁씨? 응?
    그냥 마시면 안되겠어요?
    종혁씨 머리터질까봐 걱정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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