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en Pallet : Heart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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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wen Pallet 은 토론토 출신 싱어송라이터이자 바이올리니스트다. Final Fantasy 라는 솔로 프로젝트를 통해 두장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잘 알려진 컴퓨터 게임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걸고 세번째 앨범을 최근 발표했다. 눈에 띄는 경력은 Arcade Fire 의 두장의 앨범,  그리고 Fucked up 등의 앨범에서 string section composer/engineer 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Heartland 는 그야말로 스트링의 향연이다. 조금 더 강한 어조로 말하자면 인디팝의 ‘사이즈’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과한 스트링이 곡마다 넘쳐 흐른다. Owen Pallet 의 음악을 들은 것은 이번 앨범이 처음이기 때문에 그의 과거 Final Fantasy 시절의 작업과 비교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다만 무언가 ‘관습적’ 이라는 느낌이 드는 형식과 멜로디의 흐름속에서 그만의 확고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건 단순히 스트링의 화려함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전에 인디팝이 가지고 있는 미덕을 잃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화려함속에 소박함을 함께 묻어 내고, 전형성속에 안정적인 hook 과 유려한 멜로디 라인을 가지고 있다. 상당히 인상적인 앨범이다.

과음 다음날.

어제밤엔 오랜만에 술을 잔뜩 마시고 늦게 들어 왔다. 집에 들어오니 새벽 세시 정도였던 것 같다. 집에서 뒹굴거리며 잘 쉬고 있었는데 극도로 우울해 하는 친구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고 해서 밤 늦게 뛰쳐 나갔다. 가보니 실실거리고 잘만 웃고 떠들더만. 그놈의 속마음은 내가 알턱이 없지만, 최소한 아주 즐거운 밤을 보낸 것 만큼은 확실하다. 겉저리 맴버들 끼우지 않고 나랑 스캇, 크리스 딱 이렇게만 만나서 놀았다. 미국 펍에서 논다는 건 뭐 별거 없다. 안주도 없이 쌩으로 맥주나 위스키 한잔씩 들고 여기 저기 돌아 다니면서 낄낄거리고 떠드는 게 전부다. 테이블이라는 개념도 희박하고 neighbor  에 대한 개방성도 관대한 편이라 수줍어하거나 폐쇄적이지만 않으면 마음껏 되지도 않는 영어로 떠들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들은 술자리에서의 음담패설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같은 성적인 이슈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접근하는 방식은 약간 다른 것 같다. ‘마초’ 개념도 약간 다른 것 같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쁜 여자가 더 대접을 잘 받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이거 왠지 씁슬하구만..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쪽은 미국이다. 술자리에서 자주 “씹는” 주요 대상이 된다. 이건 미국 생활 초창기부터 계속 내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쪽 바닥에서는 꽤나 늙다리에 속하는 편이어서, 그런 핫한 주제들보다는 가는 세월에 대한 한탄, 싫어하는 교수 뒷담화, 과거 화려했던 (?) 시절에 대한 자조섞인 “초라한 뽐내기”, 어디에서 더 싼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는가에 대한 정보 공유같은 얘기들을 주로 한다. 그 와중에도 크리스는 끊임없이 여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데, 그렇게 메너좋고 젠틀한 애가 왜 술집에만 가면 여자에 목숨을 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스캇은 이와는 정 반대로 절대 여자와 터치를 하지 않는다. 걔는 그냥 술을 마시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몸도 마음도 더이상 예전같지 않아서, 술먹은 다음날은 항상 고생을 한다. 소화가 잘 되지 않고, 하루종일 머리가 띵한 상태에서 집중도 잘 되지 않는다. 근육도 막 흐물흐물해지고 그래서 꼭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를 막 해줘야 한다. 훌라우프도 더 열심히 하고.. 난 배나오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흔히 ‘술배’ 라고 하는 게 나에게도 생기는 것 같다. 와, 나도 이제 30대를 향해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서 빨리 농구 리그가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 핑계 대고 일주일에 최소한 두번은 몸을 움직일테니까. 그래도 오늘은 좀 나은 편 같다. 이제 좀 씻고 (맞다, 아직도 씻지 않고 있다 -_-) 얼른 나가서 해야할 일들 부지런히 해야 겠다.

Jonny Greenwood : There Will be Blood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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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지원을 끝내고 할일없이 하루 하루를 보내던 백수 시절, 불합격 통보의 고통을 달래주던 진통제는 영화였다. 음악은 아니었던것 같다. 2008년 겨울은 그런 나를 위해서인지 참 좋은 영화들을 한국에 개봉케 했고, 평자들에 의해 미국 작가주의 영화의 르네상스라고까지 회자되었던 시기로 기억된다. 그중 단연코 최고의 작품은 “There Will be Blood” 였는데, 아직도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가 생생히 기억난다. 마치 해머로 크게 한대를 얻어 맞은 것처럼, 혹은 두시간동안 완전히 긴장되어 있던 온몸의 신경 세포들이 한순간에 이완되면서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과 같은 마비상태였다. 대단히 충격적이었고, 또 그만큼 기억에 오래 남게 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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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든 폴 토머스 앤더슨도 괴물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이 영화는 다른 두 괴물을 함께 머금고 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는 이 영화에서 단 한 씬을 제외하고 모든 씬에 등장하며, 놀랍게도 그 모든 씬에서 괴물과 같은 장악력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또다른 괴물은 영화의 OST 를 담당한 Jonny Greenwood 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영화의 중요한 단락들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꽉 조여 버리는 묘한 불협화음이 가득한 배경음악은 영화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영화의 장면들만큼이나 나는 이 영화의 음악이 꽤나 충격적이었으며, 과연 기성 영화음악인들중에 누가 이런 극히 신경질적이며 또 너무나 완벽하게 영화와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었을까 굉장히 궁금했었다. 그렇게 사람 마음을 완전히 조여버리다가 마지막에 브람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로 확 ‘제껴’ 버리는 듯한 느낌은 또 어떻게 설명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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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앤더슨은 영화가 완성되기 전 음악을 받길 원했고, 그린우드 역시 영화의 중간 편집본을 보고 음악을 만들어 앤더슨을 찾아 갔다고 한다. 앤더슨의 영화는 그린우드의 음악으로 비로소 뚜렷한 색깔과 분위기를 갖게 되었고, 그린우드는 앤더슨의 머리속에 있을 법한 사운드스케이프를 실현시킴으로써 영화의 화룡점정을 가져갔다. 괴물같은 감독과 괴물같은 뮤지션이 만나 괴물같은 영화를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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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생긴 공돈으로 결국, 나는 예전부터 사고 싶었지만 결국 매번 ‘우선 순위’ 에서 밑부분을 차지해야 했던 이 음반을 샀다. 사치라면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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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치는 폴스미스 폴로 셔츠로 마무리 지을듯;;;

Vapire Weekend : Con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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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출신 인디 밴드 Vampire Weekend 의 두번째 앨범이다. 인디 레이블에서 발매한 것 치고는 꽤나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데, 이건 이들 음악의 색깔이 더이상 마이너틱하거나 매니아틱하지 않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음반은 굉장히 흥미롭다. 이들 음악의 기본 틀, 아프리칸 리듬에 얹힌 챔버 뮤직의 미덕은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통통 튀며 발재간 구르는 듯 했던 데뷔 앨범에 비해 두번째 앨범은 상대적으로 많이 차분해 졌다. 하지만 조금 더 다채로워 졌고, 기본적인 틀 안에서 여러 변주를 통해 다양성을 추구했다. 맬로디는 여전히 아름답고, 챔버팝에 쓰이는 여러 악기들은 이들의 음악에 따뜻함을 더해 줬다. 이들만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센스있는 스트링의 쓰임은 어떤 곡에서는 약간 관습적으로 들린다. 첫 귀에 쏙 들어오는 맛은 덜하지만 들으면 들을 수록 고개를 끄덕거리며 함께 리듬을 타게 되는 걸 보니 결코 나쁜 앨범은 아니다. 음악의 본질은, 내 생각으로는, 생각하기 전에 먼저 다가오는 감정의 움직임이니까. 올 해 처음으로 듣게 된 좋은 앨범. 화려하지는 않지만 알찬 컴백이다. 개인적으로첫 싱글인 “cousins” 는 앨범의 전체적인 성격과는 약간 다른, 이질적인 트랙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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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나에게도 아이폰이 생겼다. 볼더를 방문해서 수많은 문명을 전달해 주고 간 프로메테우스 김군이 전해준 마지막 선물이다. 김군을 보면서 역시 대도시에 사는 양반이 뭔가 다르긴 다르구나 싶었다. 문명의 혜택이랄까, 이런 게 질적으로 달랐다. 어쩌면 이건 단순히 그냥 사람과 사람간의 차이일 수 있다. 나는 받아 들이는 것에 굉장히 느린 편이고,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에 반해 김군은 나보다는 훨씬 빠릿빠릿하고, 추진력이 있으며, 정보 검색력이 탁월하다. 그런 개인적인 차이가 선진 문명을 향유하는 정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김군이 보내준 8기가 3G 아이폰을 지금 막 받았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내 전화기는 아닌 셈이다. 내일 대리점에 가서 usim 칩을 내것으로 바꿔야 한다. 3GS 가 아니라 불편한 점은 조금 느리다는 정도? 하지만 그 속도가 내겐 크리티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음악이나 영화를 즐길 device 는 따로 장만했으니 8기가라는 공간이 비좁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필름 커버를 바꾸고, 새로 산 케이스를 씌었다. 김군이 워낙 깔끔하게 써서 그런지 1년 넘게 사용한 중고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우선 급한대로 몇개의 어플리케이션을 받았다. American Heritage 사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free 다. 친구의 아이폰을 가지고 놀면서 배운 건, 생활에 필요한 필수적인 어플리케이션은 대부분 공짜라는 거다. 재미를 위해, 삶의 쾌락을 위한 어플리케이션은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기본적인 생활의 편리성을 가능케 하는 어플리케이션은 대부분 공짜다. 한국에서는 아이폰이 최근에 막 소개됐는데, 과연 어플리케이션 시장이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하다. 상당히 왜곡된 형태로 변질될 수도 있고, 결국 대기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해 지리멸렬하게 사장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현재 미국에서는 아이폰으로 인해 이 시장의 페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거다. 내가 아이폰을 쓰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에는 바로 이 점이 자리잡고 있다. 아이폰으로 인해 생활의 패턴이 바뀔 수 있고, 삶의 편리성이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다. 공연장에 가면, 예전에 진짜 지포 라이터를 들고 노래를 따라 불렀던 관중들이 이젠 아이폰에서 지포라이터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받아 ‘불’을 밝히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 진짜 불이 아니어서 가치가 없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소비자들의 demand 를 지금 현재 가장 충실하게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시장은 다름아니라 아이튠즈 스토어다. 공급자의 영향력이 최소화되고 그에 따라 dead weight loss 가 최소화되는, 가격 역시 최소화되는 시장이 app store 이다. 이 시장을 제공한 건 스티브 잡스이지만, 그가 시장의 방향과 균형을 결정하지는 못하므로 그 역시 절대자의 위치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삼천포로 많이 빠지는 것 같다. 이쯤에서 접어야 겠다. 아무튼 김군에게 다시 한번 감사.

독서 취향 테스트

해보고 좀 놀랐음. 책을 많이 읽지 않는 편인데, 읽은 책들만 콕콕 골라 나온 듯한 신기함이 있었다. 취향에 대한 평가는 그렇다 치고 말이다. 밑에 나온 추천작들 외에도 신경숙, 카뮈, 에릭 호퍼, 코멕 맥카시 등등이 있었는데, 몇가지 질문만으로 취향 참 잘 잡아내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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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북방침엽수림 지대는 시베리아, 알래스카, 캐나다 등지에 가장 넓게 분포한다. 길고 혹독한 겨울과, 짧고 온화한 여름이 특징. 가혹한 기후 조건이지만 년중 고른 강수량을 유지해 북방 동식물들을 위한 최상의 환경을 제공. 전체 지구 식물군의 15%를 차지하는 타이가 수풀림은 워낙 많은 양의 기체를 생산해 지구 대기의 상태를 좌지우지함.

혹독한 추위, 거대한 영향력, 치밀한 생명력. 이런 환경은 당신의 책 취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 완벽주의 침엽수림:
    잘 짜여진, 정확한, 완벽한 내용의 책을 선호. 기술적으로 깊은 내공을 지닌 작가의 글을 선호.
  • 거만한 알래스카 동절기:
    책의 인기도, 판매량 순위 등에 거의 관심이 없음. 뻔한, 똑같은, 평범한 내용을 경멸함. 진실된, 심오한, 정교한 내용을 선호.
  • 이중적 순록떼:
    의외로 극단적이고 무례한 내용에 너그러운 편. 나름 감정적이고 열정적이며 자유로운 ‘여성적’ 콘텐트에도 관심을 보이기도 함.

당신 취향은 출판 업계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소비계층입니다. 책을 많이 소비하는 취향 그룹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책을 비평하는 평론가들은 대부분 이 취향에 속하기 때문이죠.

당신의 취향을 만족시킬만한 작가에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의 작품에 어떤 장점이 있든지 간에, 열정적인 팬들조차도 그의 작품이 끔찍하게 길다는 난처한 특징을 부인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프루스트의 남동생인 로베르가 썼듯이, “슬픈 일은, 사람들이 매우 아프거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지 중 하나에 새롭게 깁스를 하거나 결핵균이 발견되어 침대에 눕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프루스트의 끔찍하게 긴 문장의 도전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다음에 인용된 문장 하나는 표준적인 크기의 글자 한줄로 배열한다면 4미터가 조금 안되며 포도주병 바닥을 17번 감을 수 있다…
–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中

보르헤스
취팽은 운남성의 성주였는데 [홍루몽]보다 더 많은 등장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을 쓰기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길을 잃게 될 그런 미로를 만들기 위해 덧없는 성주의 권력을 포기했다. 그는 이 기이한 노작을 위해 13년이란 세월을 바쳤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그를 죽였고, 그의 소설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미로를 발견하지 못했다.
–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中

페터 회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나는 눈이나 얼음을 사랑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 동족 인류에게 애정을 갖기보다는 수학에 흥미를 가지는 편이 내게는 더 쉽다. 그렇지만 나는 삶에서 일정한 무언가를 닻처럼 내리고 있다. 그걸 방향 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자의 직관이라고 해도 된다. 뭐라고 불러도 좋다.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中

get funding back

오늘 아침 원래대로 펀딩이 다시 올랐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아직 계약서를 받아 보지 않아 확신할 순 없다. 게다가 새로 생긴 내 recitation class 가 원래 다른 TA 의 class 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뭔가 찜찜하고 미심쩍다. 그 어느 조직도 상부의 내부 정보를 모두에게 공개하지는 않겠지만, 뭐 하나 clear 하게 받아 들여지는 게 없으니 찝찝하다. anyway 오늘 English assessment 를 봤고, 나는 accent reduction program 을 듣기로 했다. 학교측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수업이라 공짜로 어학 연수하는 기분이 들어 냉큼 한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  English speaking 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accent 다. 단어중 어디에 악센트를 줘야 할 지 아직 잘 모르고, 문장중 어디에 스트레스를 주어야 하는지 잘 몰라 발음함에 있어 많이 미숙하다. 이번 학기동안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수정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게다가 이 수업은 letter grading 인데,  international graduate students 의 펀딩을 결정할 때 사용하는 랭킹의 한 지표로 삼는다고 하니 이번 학기 최선을 다해 수업에 참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의 첫번째 주에는  recitation 이 없다. 때문에 시간이 조금 널널한 편인데, 이 때 학기의 대부분의 setting 이 끝난다. 나는 펀딩이 결정됐고, recitation 스케쥴이 확정되었으며, 내가 수강하는 수업의 대략적인 스케쥴도 알게 되었다. 더이상의 게으름은 금물이다. 미국의 대학원 수업은 해야할 일이 생기는 즉시 처리해야 나중에 고생을 하지 않는다. 하긴, 굳이 미국의 대학원으로 한정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뒤로 미루면 조금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다행이다. 차를 팔지 않아도 되고, 부모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덜해 졌다. 웃긴 건 이미 부모님께 이번 학기 등록금을 받아 버렸다는 거다; 선배와 이 이야기를 하던 중 선배에게 CD 에 투자해 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은행 디파짓 이자보다는 높으니까 목돈있을 때 충분히 투자해 볼 만 가치가 있다고 한다. 나는 농담처럼 treasury bond 를 사겠다고 한다. 물론 진짜 살 마음은 없다.

한명숙 사건과 검찰의 무능력함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00115043314326&p=hankooki

http://www.ddanzi.com/news/8535.html

이쯤되면 검찰이 어떻게 만든 시나리오인지 대충 짐작이 가기 시작한다.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문제는 눈과 귀를 막은 몇십퍼센트의 한국인들이 이런 사실 정황들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수없이 확인했지만, 사실을 받아 들이는지의 여부는 철저하게 개인의 입장에 달려 있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탓이기도 하다. 써도 삼켜서 받아 들여야 발전이란 게 가능해 진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2000년이 막 시작되던 1월 1일 자정, 나는 친구들과 함께 광화문에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깔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는 와중에 친구들과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혼자 터벅 터벅 걸어서 효자동을 지나 집으로 걸어 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얼굴은 많이 늙었고, 키는 그대로이며, 몸무게도 신기하게 그대로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82년생인 나는 10대 후반의 짧은 몇년과  20대의 거의 대부분을 2000년대의 첫 10년에 흘려 보냈다. 이제 나는 30대를 서서히 준비해야 하는 나이에 이르렀고, 내 삶과 얼굴과 이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오롯이 져야 하는 인생의 한 지점에 다다랐다.

2000년은 고3이었다. 누구나 그러했듯이, 나 역시 모의고사 점수가 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지표였다. 고3때에는 그 점수가 많이 오르지 않아 마음 고생을 많이 했는데, 수능을 2주 앞두고 본 마지막 모의고사 점수가 잘 나와서 그날 밤 참 편하게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실제 수능은 망쳤다. 그로 인해 2000년의 마지막은 암흑으로 뒤덮인 채 보냈다. 난 정말 그 때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더이상의 미래도, 가능성도, 그 아무것도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인생의 각 단계마다 기회는 새롭게 주어진다. 수능을 망쳐도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면 만회할 수 있고, 대학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도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또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다. 내 삶의 각 단계마다 기회는 어김없이 다시 왔고, 그 기회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건 모두 내 책임이다. 10년이 흐르고 난 후에도 난 여전히 새로운 기회가 다시 한번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어리석게도, 아직까지 그러고 있다. 그 해 기억나는 건 친구와 함께 상아 레코드에 가서 음반을 가끔 구입하던 때다. 숨막히게 빡빡했던 하루 하루의 삶에서 주말을 이용해 살짝 그 수레바퀴를 빠져나와 음반 구경을 했던 게 거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 시절 들었던 음악들은 지금도 여전히 많이 ‘고마워’ 하고 있다. 나의 고3 시절은 순전히 음악의 힘으로 버티던 때였다.  Mercury Rev 가 특히 많은 힘을 줬다.

2001년은 내 삶에 많은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특차에 일찌감치 합격해서 꽤 여유로운 겨울 방학을 보냈는데 그 때 술만 계속 마셨던 것 같다. ‘지푸라기’ 라는 고대 후문 앞 술집에서 친구들과 매일 만나 정말 매일 술을 마셨다. 지금 주량은 다 그때 익힌 술때문이다. 입학후 첫학기는 많이 힘들었다. 대학 생활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내 지난 10년에서 가장 안타까운 게 바로 이 대학 부적응인데,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서 그랬는지 굉장히 흥미도 없어 했고 열정도 전혀 없었다. 수업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고, 시험도 공부를 하지 않고 그냥 대충 봤다. 학점도 학사경고를 겨우 면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난 랜디 존슨 전성기 방어율이었다) 그 해 유이한 즐거움은 헤럴드라는 영자 신문사와 생애 첫 연애였는데,  그때 만난 헤럴드 동기들과는 지금까지 막역하게 지낼 정도로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 때 처음 사귄 여자 친구와도 최근까지 연락이 닿을 정도로 내내 가깝게 지냈다. 헤럴드한답시고 학교에서 죽치고 살았는데 정작 수업은 안들어가고 공부도 하지 않았기에 내적으로 쌓이는 건 전혀 없었다. 학부1학년때부터 열심히 공부했던 친구들과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이 아니었나 싶다. 첫 여자친구와는 여름에 헤어졌고, 가을에 두번째 여자친구를 만났다. 앞서 말했듯이 첫번째 여자친구와는 최근까지 연락을 지속했다. 전역 후 중간 중간 다시 사귈 뻔한 적이 있었으나, 사실은 그 이후 손도 잡은 적이 없다. 지금은 열심히 회사에서 돈 벌고 있는 중이다. 그 해 늦은 가을에 할머니께서 돌아 가셨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친가쪽의 전통들은 하나둘 사라져 갔다. 집안의 윗 어른이 없으니 중심축이 사라진 셈이었고, 명절마다 잘 모이지도 않게 됐다. 물론 몇년 뒤 큰아버지가 쓰러지신 뒤로 다시 열심히 모이게 되었지만. 2001년과 2002년은 음악을 전혀 듣지 않은 시기였다. 연애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어서 였을 수도 있다. 그냥 음악을 듣지 않았고, 이 시기에는 영화에 심취했다. 허우샤오시엔을 처음 안 것도 이 때다.

2002년은 남들에겐 월드컵의 해로 기억되지만 나는 두번째 여자친구와의 연애를 했다는 기억밖에는 없다. 2학년때부터는 다행히 대학교식 공부방법에 익숙해 지게 되어 학점을 서서히 회복하게 됐는데, 그렇다고 내적인 지식이 쌓여 갔다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나의 지식 수준은 고3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지적 허세가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고, 내 안에 쌓여 있던 버블도 극대화되던 때였다. 현실의 나를 잘 받아 들이지 못했고 그래서 헛된 망상이나 되지도 않는 고집을 많이 부렸던 것 같다. 만약 그 때 나의 진짜 수준을 인정하고 그때부터서라도 제대로 착실하게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그래도 속이 조금이 더 차 있지 않았을까 한다. 지적 수준이 정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인성적인 부분에서도 성장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성장했던 부분은 연애사업에서였다. 그 해는 하루 종일, 매일같이 연애만 했고, 그러다가 11월 말에 헤어졌다. 영장을 막 받았을 무렵이다. 두번째 여자친구와는 그 이후 군대 100일 휴가때 한번 만났고, 그 이후 연락이 끊겼다가 전역후 또 한번 만났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정식으로 연락해서 만난 적은 한번도 없다. 같은 헤럴드 사람이다 보니 선배들 관련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서 가끔 만났을 뿐이다. 작년 여름 한국에 들어갔을 때 다른 선배로부터 잠깐 소식 건네 들은 게 전부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격하게 경험한 해였다.

2003년 1월 말에 군에 입대했다. 나도 주변 친구들처럼 어떻게든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발악을 했다. 이와 관련된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신장 이식 수술을 하면 군대 면제라고 어디서 들어서 장기 기증 센터에 덜컥 신장 이식 수술 신청을 해버린 것이다. 집안은 당연히 발칵 뒤집혔고, 나는 마음의 준비도 채 하지 못한채 입대했다. 군대 얘기는 뭐.. 딱히 많이 하고 싶지는 않다. 남들만큼 힘들었고, 남들만큼 즐거웠다. 훈련소 시절은 참 많이 추웠고 눈만 계속 치웠던 기억뿐이다. 그때 배운 실력으로 지금도 눈은 잘 치운다. 남들보다 눈에 대한 로맨틱한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시점이 조금은 빠르지 않았나 싶다. 신병 훈련소에서 다른 곳으로 보내지지 않고 계속 신병 훈련소에 남아 조교로 육성됐다. 근데 2003년의 거의 대부분은 조교보다는 행정병으로 살았다. 몸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밤도 많이 세웠고, 욕도 많이 먹고, 물론 맞기도 많이 맞았다. 그래도 다 군대니까.. 그러려니 한다. 군대에서 만난 내 동기, 그리고 동기와 다름없는 후임들, 친했던 고참들은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낸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냈던 사람들이라 그만큼 더 애틋하고 각별하다. 나와는 전혀 다른 배경들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라 막상 제대하고 보니 살아가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나처럼 대학교에 복학해 착실하게 졸업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도 군대를 통해 처음 알았다. 살아오면서 점점 나와 비슷한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는 것 같다. 군대는 그런 나의 좁은 인간 관계의 테두리를 많이 넓혀준 곳이다. 식품 영양사 후임, 호스트바에서 여자를 상대하는 고참, 호텔리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후임, 아무런 생각없이 돈만 축내는 후임, 조폭이 아버지인 후임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함께 2년동안 먹고 자며 지냈다. 내 인생에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진 않을 것 같다. 2003년 여름에 대구 유니버시아드가 있었는데 이 때 통역병으로 참가해서 50일동안 자대를 벗어나 놀고 먹으며 즐겁게 지냈다. 그곳에서도 역시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아쉽게도 지금까지 연락하는 사람은 없다.

2004년은 상병과 병장의 시대였다. 조교로 훈련병들과 함께 생활한 한해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군대에서 느낄 수 있는 잔재미들을 만끽하던 시기였다. 누군가를 training 시킨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인데, 2004년은 그런 의미에서 참 보람이 있었다. 군대에서 보람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정말 그냥 민간이었던 훈련병들을 제법 군인다워지게 탈바꿈시킬 때의 기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군대에서의 2년동안 제법 배운 것들이 많은데, 지금까지 인정받는 탁구 실력도 그때 다 터득한 것이고, 못밖는 것이며 공구리 치는 것등 사소한 잡일들에 대한 팁들도 이 시절 다 배웠다. 그렇다고 지금 써먹는 건 몇개 없다. 담배를 참 많이 피웠던 것 같다. 군대에서는 쉬는 시간에 할 일이 담배 태우는 것밖에는 없다. 참, 조교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수집된 모든 욕들을 다 배웠다. 내 군생활 철칙이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자였는데, 가끔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을 때엔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절대 욕을 할 수 없다. 요즘에도 평소에는 얌전하다가 가끔 술을 먹다보면 욕을 막 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게 된다. 상당히 거슬린다. 병장때 매일같이 했던 생각은 전역하면 뭐 할까, 였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역하고 해야할 일들은 뻔하고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전역하기 전의 병장의 머릿속은 참 복잡하고 아둔했다. 괜히 토플책을 보내달라고 해서 영어 단어도 외어보고, 일기장에 깨알같이 일기도 써 가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지금까지 가장 피곤한 하루 하루를 보냈고, 아이러니하게도 1분 1초의 낭비도 없이 가장 알뜰하게 살았던 한해였다. 군대여서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2005년 2월 말에 전역했다. 역시 2월 말에 복학했으니, 실질적인 사회 적응 기간은 일주일 정도에 불과했던 셈이다. 까까머리를 한 채로 2년만에 다시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고, 다른 복학생 훃아들이 하는 고생을 똑같이 겪었다.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그렇다 치고,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급기야 너무 공부가 되지 않아 피우던 담배까지 끊었다. 머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니 시간과 노력으로 make up 할 수 밖에 없었고, 복학생들이 즐겨 찾는다는 ‘K관 열람실’ 에서 밤을 지새우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복학생은 무섭다. 일단 정신력부터가 일반 학생들과는 남다른데 (학부생을 복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으로 나누는 것부터 재밌다) 그래서 학점은 잘나온다. 다만 학점이 잘 나올 수록 유행에는 점점 뒤쳐지고, 어설프게 젊은 1,2학년들 따라 했다가 구리다고 혹평만을 받기 일쑤다. 그렇다고 복학생들이 후줄근한 차림을 선호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젊어지고 싶다. 그들도 함께 놀고 싶다. 다만 그게 더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 해에는 한국은행 스터디에 들어갔는데, 이 스터디가 내 인생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의 역할을 했다. 경제학과에서 공부를 제일 잘한다는 형 누나들이 모여 있는 집단에 들어가 공부 못한다는 구박을 들어가며 매일 아침 스터디에 참가했는데, 그 스터디에서 실질적으로 배운 건 거의 없었다. 경제학에 대한 기본 바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경제학과에서 공부 잘한다는 형 누나 뒷꽁무니를 졸졸 쫓아 다니다 보니 소위 말하는 ‘테크트리’ 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떻게 경제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경제학 공부를 잘하면 어떻게 되는지 등등 많은 것들을 주워 들었다. 경제학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도 이 스터디에서였다.

2006년 1월에 호주로 잠깐 어학 연수를 다녀왔는데, 사실상의 관광이었다. 그곳에서 세번째 여자친구를 만났다. 호주 어학연수 후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결국 봄학기를 휴학하고 GRE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GRE 결과가 좋지 못했는데, 그래서 많이 낙담하고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GRE 공부한답시고 월드컵도 보지 않았다. 사실 휴학하고 GRE 공부보다는 연애에 집중했던 게 결정적인 패인같다. 계절학기부터 시작해 가을학기까지 다시 도서관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계속됐고, 세번째 여자친구와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정신이 많이 없었던 것 같다. 공부 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어서 정작 공부에는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고, 그래서 학점을 많이 올리지 못했다. 이 해 느지막히 비로소 유학에 대한 결심이 섰고, 한국 은행 스터디에서 나왔다. 세번째 여자친구에게서 정신적인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역설적이게도 결국엔 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찌 되었던 그 친구를 통해 내가 많이 배우고 성장한 건 사실이니까.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도 참 고맙다. 이 친구와는 2006년 여름에 정식으로 헤어졌고, 그 친구가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까지 연락을 계속 했다.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남아 있었으니 계속 연락하며 지냈던 것 같다. 지금 다른 사람과 결혼 준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2007년 봄학기에 다시 휴학을 했고, GRE 시험을 다시 치뤘다. 토플 점수도 이때 확보했다. 2007년의 전반기는 유학을 위한 각종 영어 시험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신촌보다 강남역이 편했고, 그곳에서 스터디 멤버들과 함께 하루종일 영어 공부만 했다. 다행히 결과들이 좋게 나와 자신감을 어느 정도 가지고 마지막 가을 학기에 복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가을 학기는 최고로 바빴다. 졸업학기에 22학점을 들었고, 유학 원서 작성부터 최종 발송까지 유학에 관한 모든 준비를 이 때 다 했으며, 이와 더불어 봉사활동까지 시작했다. 이때 만난 맑음터 사람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미국에 오느라 어쩔 수 없이 이별아닌 이별을 했지만, 일주일에 한번 그곳을 찾아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하며 보낸 몇시간은 내게 정말 소중했다. 그분들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많은 것을 받았다.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과도 친해져서 그쪽 바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장애인 학우의 필기를 대신하는 봉사활동을 했는데 그 친구랑도 많이 친해져서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 받는다. 아주 똑똑한 친구이고, 지금 CPA 를 준비하고 있다.

2008년 1월에는 유럽여행을 갔다. 상선미와 좌충우돌 동부 유럽 여행을 했고 진욱이와 영국과 아일랜드를 여행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빠리였다. 빠리에 계신 사촌 형과 형수님에게서 “유학생 결혼 생활의 정석” 을 배웠다. 그 순간 유학 기간중 결혼을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다. 물론 아직 전혀 달성된 바 없다. 진욱이와의 영국 여행중 첫번째 리젝 메일을 받았고, 그 때부터 3월 중순까지 다시 암흑의 대기 기간이 계속됐다. 연속된 리젝속에 몹시 우울한 나날이 계속됐고, 결국 그 생활은 지금 있는 대학에서의 합격 메일로 일단락됐다. 그 기간중 졸업식이 있었는데 그래서 지금도 졸업식 사진을 보면 우울한 기운이 막 느껴진다. 남들처럼 머리도 이쁘게 만지지 않고 그냥 대충 가서 가운만 입고 사진 몇장 찍고 나왔다. 대학원에 합격한 뒤부터는 출국 준비를 하나 하나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또 아무것도 아닌 일들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크게 느껴졌는지. 비자 심사때 긴장했던 거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7월 중순에 미국으로 건너 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고생중이다. 첫학기때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빨래와 설거지의 압박이었다. 빨래방이 다른 건물에 있어서 빨래 뭉치를 들고 나갔다 오는 게 참 싫었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치기도 해보고, 자동차 운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했다. 미국에 와서 정말 좌충 우돌 시트콤의 연속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참 많이 배운 것 같다. 다만 영어로 수업을 듣고, 영어로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게 참 넘기 힘든 벽인 것 같다. 지금도 넘지 못하고 있다.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첫번째 해라고 생각한다.

2009년은 대학원 두번째 학기로 시작했고, 알 수 없는 슬럼프에 시달리다가 결국 학점 폭탄을 맞았다. 몹시 괴로워 했고, 그런 감정적인 기복은 이해 여름 한국 방문까지 이어졌다. 한국 방문은 많은 인연들을 정리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10년넘게 친하게 지낸 친구들과 정치적인 견해가 맞지 않아 절교했고, 마찬가지 이유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와도 연락을 끊기로 다짐했다. 1년중 한국에 머물 수 있는 시기가 한달 내외로 한정되다 보니 한국에 남겨두고 온 관계들을 전부 감당해 내기 쉽지 않았다. 결국 가장 소중한 몇몇 지인들만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최악이었던 여름을 지나 가을학기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 코스웤이 끝나고 세미나 수업들이 시작됐고, 지적인 자극이 충분한 상태에서 원없이 공부했다. 학점의 만족 유무를 떠나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게 살았다는 것 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일단 여기까지인데 음, 지금 현재 진행중인 몇가지 중요한 사건들은 일부러 쓰지 않았다. 혹시나 관련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해서.. 과거형으로만 존재하는 기억들만 간단하게 정리해 봤다. 글을 쓰기 전에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 글을 써서 어디에 써 먹을까.’ 이다. 거의 모든 종류의 글이 의미뿐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있다.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진 글은 훨씬 명쾌하고 솔직하다. 하지만 나는 내 블로그에 글을 쓸 때 그러한 목적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들이 어딘가 모르게 답답하고 의뭉스럽게 느껴졌다면 그건 전적으로 목적성이 없는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답답함을 해소한다. 일종의 일기의 역할이다. 단어 선택을 고심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고, 몇번씩의 퇴고를 거쳐야 완성되는 글도 아니다. 다만 혼자서만 볼 수 있는 워드 파일이 아니라 공개적인 인터넷에 일기를 쓰는 이유는, 첫째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하기 위함이고 (전적으로 문법적인 부분에 국한된다) 둘째로 나의 오프라인 생활에 간섭할 여지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모순적이게도) 조금 더 솔직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몇몇 나의 오프라인 지인들이 이 블로그를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더이상 거짓말이나 위선을 부릴 수 없게 됐다. 글을 써 나감에 있어 거침이 없고, 다른 어떤 나의 글보다 꾸밈이 없으며,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솔직하게 쓸 수 있는 글이 바로 블로그에 포스팅되는 글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봐 주기를 바라지도 않고, 아무도 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글을 쓴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했지?

아무튼,

자신이 글을 쓰고 있음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는 몇몇 인간들이 생각나서 쓴 것 같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하지만 좋은 글을 쓰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렵다. 항상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한자 한자 써내려 가야 하고, 자신이 쓴 글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진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야 한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내어 간결한 표현으로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글을 쓰는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불행히도 그 것을 거의 알아갈 때쯤 미국으로 건너와 영어로 글을 쓰기 시작해야 했다. 전문적인 글쓰기, 직업적인 글쓰기를 영어로 해야 한다는 것이 참 힘들고 어렵다.

요는 이렇다. 앞으로 보내야 할 10년이 다 지나고 나면 지금과 같이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 볼 시점이 있을 것 같다.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적은 후회를 했으면 좋겠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정도면 꽤 잘 살았다는 자기 위안을 하기 바라는 건 지나친 사치인 것 같고.

지난해 블로그 읽기

내가 현재 받고 있는 rss feed 는 총 49개. 랩탑을 휴대하건 안하건 하루에 반드시 한번은 rss 확인을 하고, 너무 바쁘지 않는 한 대부분의 글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정보전달 차원에서 등록해 놓은 몇 몇 ‘되게 유명한’ 블로그들의 글은 사실 잘 읽지 않고, 개인적인 목적에서 운영중인 사적인 블로그들의 글은 되도록 꼼꼼히 챙겨 읽으려고 한다.

지난 해 의도적으로 음악 관련 블로그들의 구독을 늘렸다. 이유는 뭐.. large number of variety induces the increasing of our welfare 이기 때문에 -_- ㅋㅋㅋ 거의 대부분의 의견에 동감하게 되는 daft 님의 블로그와 felix 님의 블로그만 구독했는데 조금씩 유명한 음악 블로그분들의 블로그도 챙겨 읽기 시작했다. 그분들의 의견에 반드시 동감한다거나 follow 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나의 음악을 듣는 특유의 방법때문에 구독의 양을 증가시키고 있는 중이다.

출발은 보통 메타크리틱에서 한다. 왠만한 신보 소식은 커버가 되며 어떤 신보가 여러 매체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까지 알 수 있으니까. 피치포크, 스틸러스, 가디언같은 좋은 수준의 온라인 매거진들은 내게 조금 더 깊은 정보와 ‘이 음반을 구입할 것인가’ 라는 현실적인 판단에 대한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한글로 된 전문가의 의견을 보고 싶거나, ‘한국인의 시선’ 을 알고 싶을 땐 이런 블로그들을 이용한다. 이 음악 전문 블로그들은 또한 내가 음악 감상을 한 후 나의 감상과 판단이 과연 정당한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에도 유용하게 쓰인다. 많이 ‘배운다’ 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고 또 정확할 것 같다. 내가 뭉뚱그려 느끼던 음반에 대한 감상을 적절한 단어와 문장으로 유려하게 표현하는 필자분들의 블로그를 통해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취향을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할 수 있다.’ 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나의 취향은 퍽 한정적이다. 카테고리를 봐도 그렇고, 한 카테고리안의 다양성 정도를 봐도 그렇다. 하지만 높은 수준의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블로그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배울’ 수 있다. 혹은, 기본적으로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졌거나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듯한 사람들의 블로그를 통해 ‘묘한’ 내면적인 확대를 꾀할 수도 있다. 일종의 대리만족, 혹은 동감을 통한 자기 안정같은 거라고나 할까. 나의 블로그 읽기에는 타인의 삶을 훔쳐 보며 희열을 느끼는 관음증적인 시각은 거의 없다. 한 개인의 블로그는 철저히 조작,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읽는 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하지는 않고 읽는 편이다. 다만 기본적인 호감과 최소한의 편애는 있다. 나는 누군가가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물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먼저 이야기해 주는 편이다. 그 목록의 가장 중요한 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들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어느새 나의 취향을 일정 부분 대변하고 있고, 어쩌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좋은 단서가 이미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몇년째 계속 찾아가게 되는 블로그들도 있고, 지난 해에서야 비로소 발견하게 된 좋은 블로그들도 있다. 전자는 전자대로 진득한 정같은게 있고, 후자는 후자대로 몰랐던 것을 배워가는 맛이 쏠쏠하다.

배운다, 라는 게 꼭 특정 전문 지식이나 정보의 획득에만 국한되어 쓰이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그분들의 일상을 통해, 그냥 주절 주절 떠드는 수다를 통해서도 많은 것들을 배운다. 어떤 때는 감정적으로 격하게 동감이 되어 함께 아파도 했다가, 어떤 때는 마치 내 (오프라인) 지인이 좋은 일을 맞이한 것처럼 진심으로 기쁘기도 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상에서의 관계는 철저하게 다르지만, 어느 한쪽이 더 우위에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관계의 고리가 단단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특정 관계에 쏟는 애정의 정도는 -최소한 나에게는- 거의 일정하고 또 고르다.

성격이 별나고 예민한 편이어서, 싫어하는 것은 결코 곁에 두지 않는 편이다. 그런 성격의 극단적인 면은 군대에서 많이 누그러뜨리고 또 늙어가면서 조금씩 뭉툭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이 날이 서 있는 것 같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잔정조차 주지 않고, 심지어는 함께 말을 섞는 것조차 기피한다.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라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를 넘어서서 더이상의 관계 유지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면에서는 상당히 냉정한 편인 것 같다.

블로그도 같은 이유에서 가끔 정리할 때도 있다. 지난해에도 그렇게 몇개의 블로그를 정리했다. 안타깝거나 하지는 않다. 그냥 인연이 안닿았겠거니, 생각하고 넘긴다. 블로그라는 게 참 재밌는 것이, 성격이 잘 맞지 않으면 정말 온라인상의 관계가 끊기게 된다. 실제로 본 적이 한번도 없고, 소통의 빈도가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맞냐 안맞냐는 금방 알 수 있다. 블로깅이 하나의 사회적 관계라고 내가 확신하는 이유중에 하나다.

지난 해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리플을 잘 달지 않았다. 올해에는 리플을 많이 달아 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