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 : 자기 앞의 생(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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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링을 해보니 알라딘 블로그에서만 130개가 넘는 이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분명히 좋은 글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내가 이 책에 대해 장황하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다만 여기서는 내가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한 두가지 다른 시선들에 대해 짤막하게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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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이 책의 저자인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의 시선에 대해서. 이 소설은 그의 저작중 내게 처음으로 읽혔다. 나는 이 책을 선물받기 전 그에 대해 전혀 들어본 바 없었으며, 이 책의 속표지를 훑어 보고서야 이 문제적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나는 그의 평전을 읽어보지 않았으므로 그의 철학에 대한 작은 추측조차 할 수 없지만, 그가 대단히 치열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 소설을 써 내려 갔을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대단히 건조하고 냉소적이다. 세부적인 묘사들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직관적인 풍자와 냉소적인 비웃음은 이 책을 형성하는 두개의 큰 줄기중 하나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건 열네살 소년 모모의 생각이 아니라 철저하게 작가의 시선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세상의 모든 것을 이룬 그가 다시 한번 세상의 관심을 받기 위해,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받기 위해 가명으로 발표한 이 작품은, 그래서 펄떡 펄떡 살아 숨쉬는 문장들의 연속이다. 때때로 위악적이고, 그래서 불편함을 굳이 피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어어부 프로젝트의 음악이 계속 생각났다. 깊은 상처까지 발가 벗겨 드러낸 후의 앙상함과, 그래서 더 깊은 곳까지 볼 수 있는 혜안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이 소설의 다른 큰 줄기는 사람과 사람, 혹은 한 사람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자아의 숭고함이다. 종교적, 사회적 관습성에서 최대한 자유로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그 당시 사회적 최빈층이라 불리우는 자들을 그의 주변에 배치한 것은 결코 어떤 극적인 효과를 바라고 한 인위적 산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문화라는, 지식이라는, 혹은 도덕이라는 보호물 – 혹은 장애물 – 로 두텁게 가리워져 있는 인간의 순수한 가치는, 이 소설의 마지막 한 구절로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된다. 가진 것이라곤 전혀 없는 인물들의 초라한 이야기를 파헤쳐 냄으로써 결국 마지막에 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궁극의 결정체는, 바로 그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뭐, 당연한 말이겠지만 전적으로 내 주관적인 견해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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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으로 이 책을 선물해 준 분에 대해. 읽는 내내 대체 내게 왜 이책을 보내 주셨을까를 곰곰히 생각했다. 그 분은 남에게 책을 허투루 선물하시는 분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기로 그분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보다는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혹은 상대방에게 어떤 유의미한 반응을 불러 일으킬만한 책을 고심끝에 선택하시는 분이다. 지금까지 그 분이 보내주신 책은 한번도 내게 실망을 주지 않았다. 언제나 내게 일정 수준 이상의 공명을 불러 일으켰다. [채링크로스..] 가 그랬고, [건지 아일랜드..] 가 그랬으며, [대한민국 원주민] 이 그랬다. 헌데 [자기 앞의 생] 은, 약간 느낌이 달랐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뭔가 나에게 어떤 입장을 요구하는 듯 느껴졌다. 책에 대한 입장, 혹은 이 작가에 대한 입장말이다. 그분이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게 아니라, 책을 읽는 중간에 왠지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얘기다. 나는 그 분이 결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동정하거나 애틋하게 여기시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내 앞의 생’ 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에밀 아자르의 가난한 마음이 좋다. 그는 기름지지 않은 듯 했고, 그래서 대단히 아름다운 감정의 파고를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내 앞의 생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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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락방님이 작년 가을 보내 주셨고, 오늘 저녁에 읽었다. 읽는 내내 드뷔시의 피아노 솔로 모음을 들었는데, 감정적으로 묘한 작용을 불러 일으켰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촉촉하고 아름다운 피아노곡들을 연속으로 듣는 동안 창녀의 자식들이 길바닥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책을 덮는 순간 나의 독서중 배경음악 선택은 매우 탁월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4 thoughts on “에밀 아자르 : 자기 앞의 생(生)

  1. 사실 선물하고 싶은건 ‘로맹 가리’였어요. 그런데 로맹 가리는 정말이지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거든요. 휘어잡혀요. 만약 그 먼 곳에서 로맹 가리를 읽으면 정말 며칠간을 어떤 감정에 휩싸일 것 같아서 좀 두렵더라구요.

    자기앞의 생은, 예상하신것 처럼 무언가 입장을 요구하기 위한 선물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만약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면, 또 그렇게 생각하는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이 포스팅을 읽고나서 생각한건데,
    finicky님께 이제 로맹 가리를 선물해도 되겠구나 싶어져요.
    저는 단편의 최고는 ‘피츠제럴드’라고 생각했었는데, ‘로맹 가리’를 만나고 사실 좀 헷갈리기 시작했거든요. 대체 누구를 최고라고 해야할지 말이죠.

    • 그래서 로맹 가리의 단편집 방금 전에 주문했어요. 한두권쯤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레이먼드 카버같은 건조하고 퍽퍽한 문체를 좋아하거든요. 근데 로맹 가리같은 스타일도 한번 친숙해 지고 싶어졌어요. 피츠제럴드도 물론 좋구요 :)

  2. 아… 제가 콜로라도에 계속 있다면 어케, 책좀 빌려서 깨끗하게 읽고 (깨끗하게에 밑줄 좍!) 빨랑 돌려주고 싶다는 (빨랑에 또 밑줄 좍!)욕심이 막 생기네요. 좋겠당…

    • 흐흐 나중에 기회되면 한권 새책으로 선물해 드릴게요 :) 이소라씨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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