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을 돌아보며

2000년이 막 시작되던 1월 1일 자정, 나는 친구들과 함께 광화문에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깔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는 와중에 친구들과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혼자 터벅 터벅 걸어서 효자동을 지나 집으로 걸어 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얼굴은 많이 늙었고, 키는 그대로이며, 몸무게도 신기하게 그대로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82년생인 나는 10대 후반의 짧은 몇년과  20대의 거의 대부분을 2000년대의 첫 10년에 흘려 보냈다. 이제 나는 30대를 서서히 준비해야 하는 나이에 이르렀고, 내 삶과 얼굴과 이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오롯이 져야 하는 인생의 한 지점에 다다랐다.

2000년은 고3이었다. 누구나 그러했듯이, 나 역시 모의고사 점수가 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지표였다. 고3때에는 그 점수가 많이 오르지 않아 마음 고생을 많이 했는데, 수능을 2주 앞두고 본 마지막 모의고사 점수가 잘 나와서 그날 밤 참 편하게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실제 수능은 망쳤다. 그로 인해 2000년의 마지막은 암흑으로 뒤덮인 채 보냈다. 난 정말 그 때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더이상의 미래도, 가능성도, 그 아무것도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인생의 각 단계마다 기회는 새롭게 주어진다. 수능을 망쳐도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면 만회할 수 있고, 대학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도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또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다. 내 삶의 각 단계마다 기회는 어김없이 다시 왔고, 그 기회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건 모두 내 책임이다. 10년이 흐르고 난 후에도 난 여전히 새로운 기회가 다시 한번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어리석게도, 아직까지 그러고 있다. 그 해 기억나는 건 친구와 함께 상아 레코드에 가서 음반을 가끔 구입하던 때다. 숨막히게 빡빡했던 하루 하루의 삶에서 주말을 이용해 살짝 그 수레바퀴를 빠져나와 음반 구경을 했던 게 거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 시절 들었던 음악들은 지금도 여전히 많이 ‘고마워’ 하고 있다. 나의 고3 시절은 순전히 음악의 힘으로 버티던 때였다.  Mercury Rev 가 특히 많은 힘을 줬다.

2001년은 내 삶에 많은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특차에 일찌감치 합격해서 꽤 여유로운 겨울 방학을 보냈는데 그 때 술만 계속 마셨던 것 같다. ‘지푸라기’ 라는 고대 후문 앞 술집에서 친구들과 매일 만나 정말 매일 술을 마셨다. 지금 주량은 다 그때 익힌 술때문이다. 입학후 첫학기는 많이 힘들었다. 대학 생활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내 지난 10년에서 가장 안타까운 게 바로 이 대학 부적응인데,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서 그랬는지 굉장히 흥미도 없어 했고 열정도 전혀 없었다. 수업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고, 시험도 공부를 하지 않고 그냥 대충 봤다. 학점도 학사경고를 겨우 면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난 랜디 존슨 전성기 방어율이었다) 그 해 유이한 즐거움은 헤럴드라는 영자 신문사와 생애 첫 연애였는데,  그때 만난 헤럴드 동기들과는 지금까지 막역하게 지낼 정도로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 때 처음 사귄 여자 친구와도 최근까지 연락이 닿을 정도로 내내 가깝게 지냈다. 헤럴드한답시고 학교에서 죽치고 살았는데 정작 수업은 안들어가고 공부도 하지 않았기에 내적으로 쌓이는 건 전혀 없었다. 학부1학년때부터 열심히 공부했던 친구들과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이 아니었나 싶다. 첫 여자친구와는 여름에 헤어졌고, 가을에 두번째 여자친구를 만났다. 앞서 말했듯이 첫번째 여자친구와는 최근까지 연락을 지속했다. 전역 후 중간 중간 다시 사귈 뻔한 적이 있었으나, 사실은 그 이후 손도 잡은 적이 없다. 지금은 열심히 회사에서 돈 벌고 있는 중이다. 그 해 늦은 가을에 할머니께서 돌아 가셨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친가쪽의 전통들은 하나둘 사라져 갔다. 집안의 윗 어른이 없으니 중심축이 사라진 셈이었고, 명절마다 잘 모이지도 않게 됐다. 물론 몇년 뒤 큰아버지가 쓰러지신 뒤로 다시 열심히 모이게 되었지만. 2001년과 2002년은 음악을 전혀 듣지 않은 시기였다. 연애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어서 였을 수도 있다. 그냥 음악을 듣지 않았고, 이 시기에는 영화에 심취했다. 허우샤오시엔을 처음 안 것도 이 때다.

2002년은 남들에겐 월드컵의 해로 기억되지만 나는 두번째 여자친구와의 연애를 했다는 기억밖에는 없다. 2학년때부터는 다행히 대학교식 공부방법에 익숙해 지게 되어 학점을 서서히 회복하게 됐는데, 그렇다고 내적인 지식이 쌓여 갔다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나의 지식 수준은 고3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지적 허세가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고, 내 안에 쌓여 있던 버블도 극대화되던 때였다. 현실의 나를 잘 받아 들이지 못했고 그래서 헛된 망상이나 되지도 않는 고집을 많이 부렸던 것 같다. 만약 그 때 나의 진짜 수준을 인정하고 그때부터서라도 제대로 착실하게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그래도 속이 조금이 더 차 있지 않았을까 한다. 지적 수준이 정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인성적인 부분에서도 성장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성장했던 부분은 연애사업에서였다. 그 해는 하루 종일, 매일같이 연애만 했고, 그러다가 11월 말에 헤어졌다. 영장을 막 받았을 무렵이다. 두번째 여자친구와는 그 이후 군대 100일 휴가때 한번 만났고, 그 이후 연락이 끊겼다가 전역후 또 한번 만났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정식으로 연락해서 만난 적은 한번도 없다. 같은 헤럴드 사람이다 보니 선배들 관련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서 가끔 만났을 뿐이다. 작년 여름 한국에 들어갔을 때 다른 선배로부터 잠깐 소식 건네 들은 게 전부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격하게 경험한 해였다.

2003년 1월 말에 군에 입대했다. 나도 주변 친구들처럼 어떻게든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발악을 했다. 이와 관련된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신장 이식 수술을 하면 군대 면제라고 어디서 들어서 장기 기증 센터에 덜컥 신장 이식 수술 신청을 해버린 것이다. 집안은 당연히 발칵 뒤집혔고, 나는 마음의 준비도 채 하지 못한채 입대했다. 군대 얘기는 뭐.. 딱히 많이 하고 싶지는 않다. 남들만큼 힘들었고, 남들만큼 즐거웠다. 훈련소 시절은 참 많이 추웠고 눈만 계속 치웠던 기억뿐이다. 그때 배운 실력으로 지금도 눈은 잘 치운다. 남들보다 눈에 대한 로맨틱한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시점이 조금은 빠르지 않았나 싶다. 신병 훈련소에서 다른 곳으로 보내지지 않고 계속 신병 훈련소에 남아 조교로 육성됐다. 근데 2003년의 거의 대부분은 조교보다는 행정병으로 살았다. 몸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밤도 많이 세웠고, 욕도 많이 먹고, 물론 맞기도 많이 맞았다. 그래도 다 군대니까.. 그러려니 한다. 군대에서 만난 내 동기, 그리고 동기와 다름없는 후임들, 친했던 고참들은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낸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냈던 사람들이라 그만큼 더 애틋하고 각별하다. 나와는 전혀 다른 배경들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라 막상 제대하고 보니 살아가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나처럼 대학교에 복학해 착실하게 졸업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도 군대를 통해 처음 알았다. 살아오면서 점점 나와 비슷한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는 것 같다. 군대는 그런 나의 좁은 인간 관계의 테두리를 많이 넓혀준 곳이다. 식품 영양사 후임, 호스트바에서 여자를 상대하는 고참, 호텔리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후임, 아무런 생각없이 돈만 축내는 후임, 조폭이 아버지인 후임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함께 2년동안 먹고 자며 지냈다. 내 인생에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진 않을 것 같다. 2003년 여름에 대구 유니버시아드가 있었는데 이 때 통역병으로 참가해서 50일동안 자대를 벗어나 놀고 먹으며 즐겁게 지냈다. 그곳에서도 역시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아쉽게도 지금까지 연락하는 사람은 없다.

2004년은 상병과 병장의 시대였다. 조교로 훈련병들과 함께 생활한 한해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군대에서 느낄 수 있는 잔재미들을 만끽하던 시기였다. 누군가를 training 시킨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인데, 2004년은 그런 의미에서 참 보람이 있었다. 군대에서 보람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정말 그냥 민간이었던 훈련병들을 제법 군인다워지게 탈바꿈시킬 때의 기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군대에서의 2년동안 제법 배운 것들이 많은데, 지금까지 인정받는 탁구 실력도 그때 다 터득한 것이고, 못밖는 것이며 공구리 치는 것등 사소한 잡일들에 대한 팁들도 이 시절 다 배웠다. 그렇다고 지금 써먹는 건 몇개 없다. 담배를 참 많이 피웠던 것 같다. 군대에서는 쉬는 시간에 할 일이 담배 태우는 것밖에는 없다. 참, 조교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수집된 모든 욕들을 다 배웠다. 내 군생활 철칙이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자였는데, 가끔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을 때엔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절대 욕을 할 수 없다. 요즘에도 평소에는 얌전하다가 가끔 술을 먹다보면 욕을 막 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게 된다. 상당히 거슬린다. 병장때 매일같이 했던 생각은 전역하면 뭐 할까, 였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역하고 해야할 일들은 뻔하고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전역하기 전의 병장의 머릿속은 참 복잡하고 아둔했다. 괜히 토플책을 보내달라고 해서 영어 단어도 외어보고, 일기장에 깨알같이 일기도 써 가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지금까지 가장 피곤한 하루 하루를 보냈고, 아이러니하게도 1분 1초의 낭비도 없이 가장 알뜰하게 살았던 한해였다. 군대여서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2005년 2월 말에 전역했다. 역시 2월 말에 복학했으니, 실질적인 사회 적응 기간은 일주일 정도에 불과했던 셈이다. 까까머리를 한 채로 2년만에 다시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고, 다른 복학생 훃아들이 하는 고생을 똑같이 겪었다.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그렇다 치고,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급기야 너무 공부가 되지 않아 피우던 담배까지 끊었다. 머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니 시간과 노력으로 make up 할 수 밖에 없었고, 복학생들이 즐겨 찾는다는 ‘K관 열람실’ 에서 밤을 지새우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복학생은 무섭다. 일단 정신력부터가 일반 학생들과는 남다른데 (학부생을 복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으로 나누는 것부터 재밌다) 그래서 학점은 잘나온다. 다만 학점이 잘 나올 수록 유행에는 점점 뒤쳐지고, 어설프게 젊은 1,2학년들 따라 했다가 구리다고 혹평만을 받기 일쑤다. 그렇다고 복학생들이 후줄근한 차림을 선호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젊어지고 싶다. 그들도 함께 놀고 싶다. 다만 그게 더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 해에는 한국은행 스터디에 들어갔는데, 이 스터디가 내 인생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의 역할을 했다. 경제학과에서 공부를 제일 잘한다는 형 누나들이 모여 있는 집단에 들어가 공부 못한다는 구박을 들어가며 매일 아침 스터디에 참가했는데, 그 스터디에서 실질적으로 배운 건 거의 없었다. 경제학에 대한 기본 바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경제학과에서 공부 잘한다는 형 누나 뒷꽁무니를 졸졸 쫓아 다니다 보니 소위 말하는 ‘테크트리’ 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떻게 경제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경제학 공부를 잘하면 어떻게 되는지 등등 많은 것들을 주워 들었다. 경제학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도 이 스터디에서였다.

2006년 1월에 호주로 잠깐 어학 연수를 다녀왔는데, 사실상의 관광이었다. 그곳에서 세번째 여자친구를 만났다. 호주 어학연수 후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결국 봄학기를 휴학하고 GRE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GRE 결과가 좋지 못했는데, 그래서 많이 낙담하고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GRE 공부한답시고 월드컵도 보지 않았다. 사실 휴학하고 GRE 공부보다는 연애에 집중했던 게 결정적인 패인같다. 계절학기부터 시작해 가을학기까지 다시 도서관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계속됐고, 세번째 여자친구와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정신이 많이 없었던 것 같다. 공부 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어서 정작 공부에는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고, 그래서 학점을 많이 올리지 못했다. 이 해 느지막히 비로소 유학에 대한 결심이 섰고, 한국 은행 스터디에서 나왔다. 세번째 여자친구에게서 정신적인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역설적이게도 결국엔 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찌 되었던 그 친구를 통해 내가 많이 배우고 성장한 건 사실이니까.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도 참 고맙다. 이 친구와는 2006년 여름에 정식으로 헤어졌고, 그 친구가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까지 연락을 계속 했다.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남아 있었으니 계속 연락하며 지냈던 것 같다. 지금 다른 사람과 결혼 준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2007년 봄학기에 다시 휴학을 했고, GRE 시험을 다시 치뤘다. 토플 점수도 이때 확보했다. 2007년의 전반기는 유학을 위한 각종 영어 시험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신촌보다 강남역이 편했고, 그곳에서 스터디 멤버들과 함께 하루종일 영어 공부만 했다. 다행히 결과들이 좋게 나와 자신감을 어느 정도 가지고 마지막 가을 학기에 복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가을 학기는 최고로 바빴다. 졸업학기에 22학점을 들었고, 유학 원서 작성부터 최종 발송까지 유학에 관한 모든 준비를 이 때 다 했으며, 이와 더불어 봉사활동까지 시작했다. 이때 만난 맑음터 사람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미국에 오느라 어쩔 수 없이 이별아닌 이별을 했지만, 일주일에 한번 그곳을 찾아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하며 보낸 몇시간은 내게 정말 소중했다. 그분들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많은 것을 받았다.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과도 친해져서 그쪽 바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장애인 학우의 필기를 대신하는 봉사활동을 했는데 그 친구랑도 많이 친해져서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 받는다. 아주 똑똑한 친구이고, 지금 CPA 를 준비하고 있다.

2008년 1월에는 유럽여행을 갔다. 상선미와 좌충우돌 동부 유럽 여행을 했고 진욱이와 영국과 아일랜드를 여행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빠리였다. 빠리에 계신 사촌 형과 형수님에게서 “유학생 결혼 생활의 정석” 을 배웠다. 그 순간 유학 기간중 결혼을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다. 물론 아직 전혀 달성된 바 없다. 진욱이와의 영국 여행중 첫번째 리젝 메일을 받았고, 그 때부터 3월 중순까지 다시 암흑의 대기 기간이 계속됐다. 연속된 리젝속에 몹시 우울한 나날이 계속됐고, 결국 그 생활은 지금 있는 대학에서의 합격 메일로 일단락됐다. 그 기간중 졸업식이 있었는데 그래서 지금도 졸업식 사진을 보면 우울한 기운이 막 느껴진다. 남들처럼 머리도 이쁘게 만지지 않고 그냥 대충 가서 가운만 입고 사진 몇장 찍고 나왔다. 대학원에 합격한 뒤부터는 출국 준비를 하나 하나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또 아무것도 아닌 일들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크게 느껴졌는지. 비자 심사때 긴장했던 거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7월 중순에 미국으로 건너 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고생중이다. 첫학기때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빨래와 설거지의 압박이었다. 빨래방이 다른 건물에 있어서 빨래 뭉치를 들고 나갔다 오는 게 참 싫었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치기도 해보고, 자동차 운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했다. 미국에 와서 정말 좌충 우돌 시트콤의 연속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참 많이 배운 것 같다. 다만 영어로 수업을 듣고, 영어로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게 참 넘기 힘든 벽인 것 같다. 지금도 넘지 못하고 있다.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첫번째 해라고 생각한다.

2009년은 대학원 두번째 학기로 시작했고, 알 수 없는 슬럼프에 시달리다가 결국 학점 폭탄을 맞았다. 몹시 괴로워 했고, 그런 감정적인 기복은 이해 여름 한국 방문까지 이어졌다. 한국 방문은 많은 인연들을 정리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10년넘게 친하게 지낸 친구들과 정치적인 견해가 맞지 않아 절교했고, 마찬가지 이유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와도 연락을 끊기로 다짐했다. 1년중 한국에 머물 수 있는 시기가 한달 내외로 한정되다 보니 한국에 남겨두고 온 관계들을 전부 감당해 내기 쉽지 않았다. 결국 가장 소중한 몇몇 지인들만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최악이었던 여름을 지나 가을학기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 코스웤이 끝나고 세미나 수업들이 시작됐고, 지적인 자극이 충분한 상태에서 원없이 공부했다. 학점의 만족 유무를 떠나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게 살았다는 것 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일단 여기까지인데 음, 지금 현재 진행중인 몇가지 중요한 사건들은 일부러 쓰지 않았다. 혹시나 관련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해서.. 과거형으로만 존재하는 기억들만 간단하게 정리해 봤다. 글을 쓰기 전에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 글을 써서 어디에 써 먹을까.’ 이다. 거의 모든 종류의 글이 의미뿐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있다.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진 글은 훨씬 명쾌하고 솔직하다. 하지만 나는 내 블로그에 글을 쓸 때 그러한 목적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들이 어딘가 모르게 답답하고 의뭉스럽게 느껴졌다면 그건 전적으로 목적성이 없는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답답함을 해소한다. 일종의 일기의 역할이다. 단어 선택을 고심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고, 몇번씩의 퇴고를 거쳐야 완성되는 글도 아니다. 다만 혼자서만 볼 수 있는 워드 파일이 아니라 공개적인 인터넷에 일기를 쓰는 이유는, 첫째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하기 위함이고 (전적으로 문법적인 부분에 국한된다) 둘째로 나의 오프라인 생활에 간섭할 여지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모순적이게도) 조금 더 솔직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몇몇 나의 오프라인 지인들이 이 블로그를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더이상 거짓말이나 위선을 부릴 수 없게 됐다. 글을 써 나감에 있어 거침이 없고, 다른 어떤 나의 글보다 꾸밈이 없으며,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솔직하게 쓸 수 있는 글이 바로 블로그에 포스팅되는 글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봐 주기를 바라지도 않고, 아무도 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글을 쓴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했지?

아무튼,

자신이 글을 쓰고 있음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는 몇몇 인간들이 생각나서 쓴 것 같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하지만 좋은 글을 쓰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렵다. 항상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한자 한자 써내려 가야 하고, 자신이 쓴 글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진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야 한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내어 간결한 표현으로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글을 쓰는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불행히도 그 것을 거의 알아갈 때쯤 미국으로 건너와 영어로 글을 쓰기 시작해야 했다. 전문적인 글쓰기, 직업적인 글쓰기를 영어로 해야 한다는 것이 참 힘들고 어렵다.

요는 이렇다. 앞으로 보내야 할 10년이 다 지나고 나면 지금과 같이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 볼 시점이 있을 것 같다.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적은 후회를 했으면 좋겠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정도면 꽤 잘 살았다는 자기 위안을 하기 바라는 건 지나친 사치인 것 같고.

8 thoughts on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 퇴고하면서 딱 한명만이라도 재밌게 읽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다행이예요. 사실 뻥은 없지만 감추는 건 좀 있죠. 되게 민감한 기억 몇개는 일부러 뺐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읽어 주셨다면야.. :)

  1. 우선 와우~ 지난 10년동안의 일들이 그렇게 일일이 다 생각이 나나요? 나도 함 곰곰히 생각해보면 기억이 날라나? 에고…

    저도 몇몇 지인들이 가끔씩 들어와서 보고가니 거짓으로 쓸수가 없네요. 솔직하게 쓰고나면 약간의 카타르시스 작용도 있구요. 근데, 여기서까지 거짓으로 쓰면… 그런거 써서 뭐한다요? ^^

    • 전 쓰면서 계속, 1년을 단 몇줄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제 기억력을 탓했는 걸요. 맞아요, 솔직하게 쓰면 확실히 시원한 맛이 있어요.

  2. 이걸 보고 나도 한번 써볼까. 라는 생각을 하고 주욱 정리를 하니..
    20대라는 청춘을 물쓰듯 낭비하며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영영 못 쓸것 같아요.^^

    • 지난 10년이 되게 궁금한 분들중 한분이신데, 뭐 나중에라도 들어볼 기회가 있겠죠. :)

  3. 글을 쓰면서 답답함을 해소하는 것! 이전보다 자주 쓰지는 않아도 블로그에 계속 쓰게 되는 이유입니다. Diary의 포스트를 죽 읽다가 ‘글을 써 나감에 있어 거침이 없고, ~ 아무도 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글을 쓴다.’ 이 부분에 굉장히 공감했어요. (다시 찾는데 조금 시간이 걸려버렸습니다…)

    저는 대학교까지는 기억이 잘 나는데 졸업 후 4년 정도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뒤엉켜 있어요. 가끔 혼자 꼽아봅니다. 05년에 뭘 했더라? 하고요.

    • 글이 쓸데없이 길어서 찾는데 고생하셨죠 ^^; 워드 파일을 열고 쓰게 되는 페이퍼나 그외 공적인 글들, 혹은 쥐메일 창에서 쓰게 되는 대단히 업무적이거나 대단히 관계 중심적인,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쓰게 되는 편지들을 쓸 때와는 많이 달라요. 감정적으로요. 바깥 생활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집 문을 열고 들어 왔을 때 누그러지는 그런 마음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블로그에 글을 쓸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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