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en

오랜만에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 왔다. 시험 끝나고 3일 연속으로 술을 마셨는데, 취한 적은 지금이 처음이다. 한국인 선배들, 연배 높으신 한국인 형님들과 술을 마시다 보니 긴장해서 쉽게 취하지 못했나 보다. 오늘은 스캇의 생일이었고, 생일 파티라고까지는 하지 못하겠고 그냥 가볍게 저녁 한끼 먹고 근처 술집에서 술한잔 하고 들어 왔다. 마신 양으로만 따지면 며칠 전보다 훨씬 적은데, 확실히 편한 사람과 마시니 금방 취한 것 같다.

올 여름 한국 인사동거리에서 사온 거북이 모양의 장식품을 선물로 줬다. 선물을 준비해 온 사람이 저녁 식사를 함께한 일곱명중 나 하나여서 본의아니게 많이 쑥스러웠는데, 아무튼 ‘福’ 자가 선명하게 자수로 새겨져 있는 거북이 (이놈도 복을 상징한다지) 를 선물로 주고 앞으로 1년동안 좋은 일만 계속 있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빌어 줬다. 동양의 복 개념과 서양의 fortune 개념은 미묘하게 다른 것 같다. 그래서 그 놈이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원래대로라면 미친척하고 스캇 옆에서 춤도 추고 폭탄주도 마셔가며 분위기를 띄어야 했건만, 왠일인지 오늘은 모두가 차분한 분위기에서 뜬금없이 영화퀴즈를 했던 지라 나는 옆에서 그냥 풋볼이랑 농구 게임에만 집중했다. 그러게 내가 corner o’neil 을 가자고 했지.. 거기 가면 carbamb 과 함께 미쳐 줄 수 있건만..놈이 프리림을 두개나 봐야 하는지라 이번 겨울이 못내 여유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오후에도 문자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으니, 가뜩이나 내성적이고 소심한 스캇의 성격에 두개의 프리림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 일찍 헤어진 것도 그 이유때문일 테고.

볼더의 겨울은 춥다. 추운 만큼 썰렁하고 을씨년스럽다. 여기 저기 캐롤이 울려 퍼지고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집집마다 걸려 있어 지금이 어느 시즌인지 알기는 어렵지 않지만, 나같은 가난한 유학생에겐 조금 더 소외감을 느끼기 좋은 시즌일 뿐이다.

내일 아이폰을 사기로 했다. 어무니가 크리스마스 카드대신 500달러를 보너스로 부쳐 주신다고 했으니, 먹거나 노는 비용으로 충당하기 전에 add a line 으로 싼 값에 하나 장만해야 겠다. 아이폰을 사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한글로 문자를 보내기 위해서. 영어로 한국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는 엿같은 상황은 더이상 연출하기 싫다. 뭐.. ESPN 이나 NBA.com 에서 스코어보드 확인하기 위해서라고는 말 못하겠고..

정신이 어지러워 헛소리를 해 가며 차를 얻어 타고 왔다. 술에 취한다고 해서 특별히 주정을 부린다거나 딱히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닌데, 편한 사람들 앞에서 말을 조금 더 많이 하는 경향은 있는 것 같다.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에선 ‘그래, 이 얘기는 하지 말자.’ 라고 꾹 눌러 담을 만한 것들을 술에 취하면 괜히 용기가 덧붙여져서 꼭 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알싸한 후회와 함께 머쓱한 웃음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하는 건 항상 덤처럼 따라오는 sequel.

나는 스캇이 좋다. 앵글로 섹슨 애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태생적 한계를 감안하지 않고서라도 그놈의 배려심과 섬세한 마음 씀씀이가 내내 고맙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놈도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가끔은 한국에 있는 진우가 떠오른다. 3년이라는 시간을 오롯히 함께 보냈고, 그 시기가 우리의 그 이후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래서 우리는 거의 같은 정체성과 가치관을 가지고 오늘의 삶을 살아간다. 그 친구와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1년에 한번을 채 만나기 힘들었음에도 우리는 만날 때마다 아직도 우리가 같은 선상에서 같은 고민과 같은 point of view 를 가지고 있음에 놀랐다. 전혀 다른 상황에 놓여져 있고 전혀 다른 삶의 task 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농담으로 스캇이 그런 말을 한적이 있다. (이것도 역시 술에 취해 한 말이었을텐데) “너가 미국에 태어났으면 나처럼 되었을 것이고, 내가 한국에 태어났으면 너처럼 살아 갔겠지.” 그정도의 상대성만 가지고 있어도 아주 감사할 따름이다.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

내일 하루 조용하게 보내면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시애틀로 간다. 거기서 4박 5일을 보내고 돌아오면 김군을 덴버 공항에서 만난다.

바쁘지만 결코 나쁘지 않은, 감사하기만 한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다.

4 thoughts on “drunken

  1. 우와, 마지막에 스캇이란 친구분이 하신 말.. 찌릿- 하네요 ㅎㅎ
    그 멀고 넓은 나라에서 그런 친구 만나셨으니 행운이 아닐까요!?
    럭키럭키~ (좋댄다)

    즐거운 방학 보내시고~ 여행도 재미나게 하세요~
    미리 메리크리스마스! (포풍같은 우박이나 쏟아져라.. 하고 싶지만;
    예의상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도햅니다)

    ㅇㅅㅇ

    • 다행히 우박은 맞지 않았구요, 콜로라도로 돌아오니 눈이 엄청 내려서 길이 꽝꽝 얼어 붙었어요. 아마 이게 다 아침해쌀님 덕분인 듯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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