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

매번 똑같이 되풀이하는 얘기지만, “미성년자” 라는 카테고리가 법적으로 효력화되고 그로 인해 “미성년자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 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건 100년이 채 안되는 얘기다. 미성년자에 대한 법적인 보호 조치는 산업화 과정을 먼저 겪던 일부 선진국들이 나이가 어린 노동자들에 대한 열악한 근무 요건을 개선하다가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 또한 미성년자가 우선시되어 고려되었던 건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해야만 했던 시기에 한 부분으로 가만히 따라 들어간 것이 결국 “만 19세” 라는 상당히 공고한 선을 하나 새로 긋게 된 셈이다.

미성년자라는 존재가 철학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정언’ 인가?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절대적 규칙성을 담고 있는 존재인가에 대해서 회의감이 많이 든다. 미성년자는 단지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권리를 박탈당한다. 술과 담배가 성인보다 미성년자에게 얼마나 더 해로운지 모르겠지만, 나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때문에 수많은 성인들이 합법적으로 “제한없이”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재들을 단 1g 도 구매할 수 없다. 성인이 미성년자보다 더 논리적 판단력이 뛰어나다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불확실한 추측이 엄청난 권력을 가지는 법에까지 효력을 미친다는 게 나는 결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나보다 훨씬 똑똑한 15살 아이들이 세상에 널려 있다. 나보다 훨씬 사리판단 똑부러지게 하는 12살 초등학생들도 세상에 널려 있다. 누가 그들에게서 힘과 권력을 빼앗아 버렸는가? 어른들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법적으로 허용된 근무 가능 연령이 되었는데도 (즉 다시말해 소비재를 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는데도 불구하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한다는 건 너무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런지. 그리고 실제로 국가가 혹은 사회가 일부 미성년자들을 정말 효율적으로 보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여기 두가지 예가 있다. 9살짜리 여자애를 성기가 문드러질 정도로 성폭행한 한 남자는 12년형을 선고받고 “너무 과하다” 라고 했다. 12살에 급우를 살해한 최군은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그조차 제대로 치루지 않고 나와 뉘우침없이 잘 살고 있다.

무엇이 미성년자를 위한 제대로 된 법집행인지 생각해 봐야 겠다. 나는 미성년자에 대한 관대한 법집행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미성년자에 대한 과도한 보호를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저 위의 두 케이스 모두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법학자가 아니라서 세부적인 법의 적용 여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법의 ‘효율성’ 을 고려하면 저 위의 두 케이스 모두 제로에 수렴하지 않을까 한다. 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법집행은 경제학적으로 가치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경우가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는 미성년자에게 관대한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미성년자를 철저하게 지켜주지도 못한다. 그저 억압의 대상이 되기 쉽상이고, 낮은 사회적 지위로 말미암아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된다. 미성년자들은 우리나라에서 끊임없이 수탈당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들은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다. 밤늦도록 학원을 죽도록 다녀봤자 아주 간단한 수준의 에티켓도 익히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 아이들의 정체성이다. 이건 철저히 국가와 사회의 탓이다. 국가와 사회가 미성년자에게 가지는 의무는 딱 두가지다. 제대로 된 교육과 법적인 보호 장치. 그리고 그들에게 요구하는 의무사항, 즉  ‘철학’ 은 간단하다. 사회의 규범과 윤리를 제대로 몸에 익힐 것. ‘재사회화’ 라고 중학교 사회시간에 많이 들어본 말이 왠지 멀게 느껴진다. 국가가 미성년자를 처벌할 때 떳떳하고 싶다면, 제대로 된 교육 시스템을 먼저 구축하는게 옳다. 최군에 대한 강력한 처벌은 이런 차원에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재사회화에 실패한 낙오자다. 사회의 ‘상식’ 에 부합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데 이걸 전적으로 그 사람의 개인적인 챔임으로 돌리기에는 국가의 방조가 너무 심했다.

Melitz and Markusen

Melitz 의 2003년 논문을 읽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흥분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요즘 트레이드하는 사람들 중 그 논문 인용안하는 사람 없다고, 그걸 지금에서야 알았냐고 대꾸했다. Intuition 의 혁신성뿐만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주욱 밀고 나가는 methodology 가 더 충격적이었다. 그 긴 논문에서 단 한 문장도 허투루 사용되는 법이 없었고, 하나의 문장과 그 다음 문장이 논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equation 이야 중간 증명 과정의 생략이 많아 100%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복잡한 식들 역시, 하찮아 보이는 parameter 하나도 모두 경제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트레이드에 관심이 큰 편도 아니고 그저 세미나 수업 하나를 들을 뿐이지만 읽는 내내 황홀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중에 찾아보니, 이미 논문 인용 횟수에서 역대 경제학 논문들 중에서도 탑을 달리고 있을 만큼 대단한 페이퍼였고, 이 논문을 쓴 Melitz 라는 양반은 아직 채 40이 되지 않은, 그러니까 John Bates Clark Medal 을 받을 확률이 상당히 높은 촉망받는 젊은 경제학자였다.

http://www.economist.com/businessfinance/displayStory.cfm?story_id=12851150

이코노미스트지가 선정한 8인의 전도 유망한 젊은 경제학자 그룹에도 선정되었다.

오늘 Melitz 의 2008년 논문을 읽으면서 2003년 논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길 바랬는데, 그건 좀 요원한 것 같고, 흥미로운 건 Markusen 의 이름이 자주 언급된다는 거였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거의 대부분의 트레이드 페이퍼는 Krugman 의 1980 년 논문을 인용하고 있고, 또 그의 이론을 모델링의 기반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노벨상까지 받은 양반이니 응당 그런 대접을 받을 만 하다 싶었다. Markusen 은 현 트레이드 학계에서 크루그먼보다 더 많이 인용되고 언급되는, 거장중 거장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수업을 듣고 있고, 매주 두번씩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비록 일방적이긴 하지만…). Markusen 이 이룩한 대부분의 업적은 krugman 의 gains from variery 와 geographic economics 가 정설로 자리를 잡은 이후 발표한 것들이어서 아직 그의 논문을 읽을 시점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슬슬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페이퍼들을 읽기 시작하니 나름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Melitz 는 트레이드 시장의 개방을 통해 ‘상품의 다양화’ 가 이루어 지고 수입 시장의 ‘규모’ 가 커지면서 그 결과 각 기업의 마크업을 줄이고 경쟁을 심화시켜 가장 생산성이 떨어지는 기업을 시장에 퇴출 시키는 그 과정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해 냈다. 그의 논문에는 empirical data analisys 가 전혀 없지만, 이 논문을 읽는 사람 모두가 당연히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로 꽤나 보편적인 논리성만을 기반으로 한다. 이게 경제학의 진수가 아닐까 한다. 경제학은 사실 철학이나 물리학, 수학과 같은 보편성에서 한발 더 나아간 높은 수준의 논리성 혹은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제학이 바라보고 관찰하는 대상 자체가 일반적인 인간들이 행하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밥을 먹으면서 철학을 하진 않고, 물건을 구매하면서 극대화 문제를 매번 풀지는 않는다. 때문에 ‘상식 수준’ 의 논리성만을 기반으로 argument 를 진행시켜 나가는 게 오히려 맞다고 본다. Melitz 는 그걸 해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그 심플한 논리 전개. 그의 이론은 이제 ‘new new trade theory’ 로 각광받고 있다. 20년전 Krugman 이 그런 식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던 것처럼.

몸살

내 몸은 내가 안다. 지난 몇년간 지속적으로 내 몸 상태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는데, 그래서 이제 왠만한 변화는 민감하게 포착해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여, 요즘 몸상태는 영 말이 아니다. 적신호까지는 아니지만 노란 신호등정도가 켜졌달까.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고, 피곤함을 느끼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한계치도 많이 떨어졌다. 잠이라는 게 일종의 재충전 역할을 해주는 것 같은데, 잠을 적게 자면 그만큼 다음날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요즘은 같은 수준의 잠을 자도 버틸 수 있는 능력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저히 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최근 며칠간 경수 누나 이사하는 것을 도와줬다. 그 와중에 아침에 일어나 토플도 보고. 이제 잠시 쉬었으니 과제를 해야 한다. 월요일까지 해야 하는 게 하나, 내일 아침까지 제출해야 하는 게 하나다. 이번주 내내 일찍 일어났고 (하지만 잠은 여전히 늦게 잤으며) 하루종일 쉴틈이 거의 없다 보니 약간 무리한다는 느낌은 있었는데 눈 밑에 이상한 피부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 사람이 피곤하면 입술이 트는데, 나는 얼굴중 피부가 약한 다른 부분이 튼다. 광대뼈 주변이 항상 그러더니, 최근엔 코 밑이 그랬고, 이젠 눈 밑으로 이사를 왔나 보다. 덕분에 얼굴은 참으로 흉측한 모양새가 되었다. 내가 피해야 할 것들 : 부족한 수면, 커피, 담배, 지나친 섹스 혹은 자위, 끼니 거르는 것 혹은 폭식, 돼지고기 혹은 그외 기름진 음식들, 스트레스 혹은 자기 비하, 다른 사람에 대한 나쁜 감정, 그리고 자신감 결여. 이 모든 것들이 내 피부를 망가뜨린다.

아마 조만간 몸살을 한번 할 것 같다. 창문을 열어 놓고 잤더니 침을 삼키기 힘들 정도로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며칠째 지내고 있는데, 경험상 이렇게 목이 오래 아프면 반드시 열이 나게 되어 있고, 그 상태에서 몸이 쉬지를 못하고 무리를 하게 되면 반드시 몸살을 하게 되어 있다. 다행인 건 지금 내 몸이 긴장하는 정도가 심하지 않다는 건데, 만약 이런 상황에 시험같은 것까지 겹쳤다면 굉장히 심하게 앓았을 것 같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토플을 봤다. 부디 한번에 100점이 넘길 바라면서. 시험을 본지 2년이 다되어서 어떤 유형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 리딩을 풀면서 매우 당황. ‘아니 문제가 이렇게 어려웠나?’ 싶었다. 특히 내가 가장 싫어하는 천문학 지문이 나왔을 때는 완전 패닉. supernova 가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ㅋ 리스닝과 라이팅은 확실히 미국에서 1년 산 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고, 기대했던 스피킹에서는 생각보다는 실망스러웠던 것 같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구성을 완벽하게 하지도 못했고, 발음도 좋지 못했다. 역시 다음에 다시 볼때는 스캇을 시험장 앞에 데려다 놓고 한 30분 수다를 떨다가 들어가야 겠다 ㅋ

난 the xx 의 곡중에 인트로가 제일 좋다. 느낌이 그냥.. 휑하고 썰렁한 뒷골목 느낌이 나서 좋다.

악몽

요새 계속 좋은 꿈은 꾸지 못한 것 같다. 근데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날 정도의 악몽을 꾼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내가 꾸는 악몽의 장르는 단조로운 편인데, 요즘은 운전을 자주 해서 그런지 운전할 때 브레이크가 듣지 않아 사고가 나는 꿈을 자주 꾼다. 평소에 운전하면서 긴장을 제일 많이 한다는 뜻인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래서 어제 잠을 두세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는 거다. 수면시간이 거의 제로로 점점 수렴해 가고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켄튼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당장 의사의 처방을 받으라고.. ㅋ 여긴 의사 한번 만나는 것도 엄청 비싸서, 의사 얼굴을 잘 볼 수가 없다.

결국 아이팟은 클래식 사기로 했음 ㅋ 내 주제에 무슨 얼리 어답트냐.. 문제는 돈. 빨리 월급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the point

커피를 마신 날은, 어김없이 잠을 설친다. 아침에 피곤함을 잊기 위해 마시는 한잔의 여파가 새벽까지 이어진다니, 나도 어지간히 커피가 받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나 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커피를 좋아하시는데, 가족중 유독 나만 커피를 잘 못마신다. 하긴, 요새 잠을 설치지 않은 날은 없으니까, 굳이 이 불면증을 커피탓으로 돌릴 이유는 없겠지. 잠을 자지 못해 매일 아침 피곤에 힘겨워 하는 나날이 몇달째 계속되고 있다. 아마 한국에서 돌아온 후 한번도 쉬지 않고 반복되는 힘겨움인 것 같은데, 정신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듯 싶다. 스트레스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겠지. 너무 너무 스트레스를 요즘 많이 받고 있다. 잠들기 전 다음날에 대한 불안함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기 시작한 건 몇년 됐는데,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는 느낌이다. 왜이럴까, 삶이 갈수록 힘들어 진다.

학교 도서관이 1층 로비를 리뉴얼했고, 한국의 모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호화스러운 공간이 24시간 개방을 한다. 나는 그곳에서 파는 파니니와 샌드위치를 좋아해서, 이번 학기부터 다시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덕분에 자제해야 하는 커피의 양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빠리에서 만난 사촌형이 에펠탑을 바라보며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잔에 대한 예찬을 함참이나 늘어 놓는 바람에 내 허파에도 바람이 들어갔는지, 그 독한 에스프레소를 가끔 마시게 된다. 커피향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짧게 끊어지는 에스프레소의 목넘김을 좋아하는 편이다.

어쩌면, 내 삶을 기다란 하나의 선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나의 이 힘겨움은 단지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이렇게다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일들이 밀려 있다. 사진도 찍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다.차를 타고 멀리 나가고 싶기도 하다. 몸은 도서관에 메여 있고, 눈은 페이퍼의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한글로 다음어진 글들이 고프다.

오키나와도 놀러가고 싶다.

옛 생각.

간밤에 잠이 안와 밤을 새우고 있는 중이다.

언제부턴가 음악이나 영화같은 지적 재산권의 보호가 미흡한 분야에 대해서는 특히나 더 신경을 써서 합법적인 지불 과정을 통해 구입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시디를 구입하고 리핑해 다시 아이튠스로 옮기는 번거로운 과정을 반복해야 했고 (멍청하게도 나는 아이튠즈에서 바로 리핑이 된다는 걸 출국 직전에야 깨달았다!) 미국에 와서는 아이튠즈를 통해 보다 저렴한 가격에 음원을 구입해서 듣고 있다. 음악쪽은 확실히 아이튠즈 덕분에 구매 과정이 훨씬 간편해 진 점이 없지 않아 있는데, 영화쪽은 모든 구매 통로가 거의 완벽하게 막혀 버렸다. 내가 주로 보는 영화들은 거의 유럽 혹은 아시아 자본으로 만들어진 것들이고 그래서인지 언어도 영어가 아닌 경우가 많은데, 아이튠즈에는 외국어 영화에 대한 서비스가 전무한 실정이다. 그렇다고 시네큐브나 스폰지하우스같은 소규모 독립영화 상영관이 있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미국은 역시나 할리우드의 본고장답게 할리우드 영화들이 도미넌트하다. 대도시를 끼고 있지 않은 나같은 경우에는 그래서 영화쪽에서 다양성의 혜택을 받기가 힘든 형편이다.

결국 한참 야동 많이 볼때 애용하던 폴더플러스를 다시 이용할 수 밖에 없게 되었는데, 나름 만족하는 점이 폴더 플러스가 양지로 나오면서 영화 파일들을 제값을 지불하고 (제값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적지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그 데이타 베이스 자체는 미흡하기 이를데 없다. 찾는 영화가 없는 경우가 99%이지만, 최소한 아이튠즈보다는 나은게 한국 영화와 제3세계 영화는 있으니까.. 그래서 오늘 큰맘먹고 3만원어치 결제를 한 다음 영화당 천원, 혹은 이천원씩 내고 다운을 왕창 받았다. 아이팟 터치도 없으면서 아이팟 터치 버젼으로 받는 건 무슨 경우? ㅋ 그래도 좋다고 받았다.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 부터 4개월 3주 그리고 2일 까지. 대여섯편은 다운받은 것 같다.

폴더 플러스에 오랜만에 들어가서 보고 싶은 영화를 찾아 이곳 저곳을 뒤적이다가 2001년~2002년 영화들, 그리고 2006년~2007년 영화들을 발견했다. 내가 연애하던 시절의 영화들인데, 그래서 다른 시절보다 조금 더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연애할 때 가장 저렴하면서도 꽤 괜찮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영화 구경인데, 폴더 플러스에 올려진 영화 목록들을 보면서 나도 참 영화 많이 봤구나, 싶었다. 영화가 참 고마운 점이, 특정 영화와 관련된 주변의 기억들까지 한꺼번에 환기가 되는 효과가 있어서 추억을 여러모로 곱씹어 볼 수 있다는 거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웠던 기억부터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그런 기억까지, 퍽퍽한 일상속에 잊고 지내던 그 소중한 기억들이 영화 제목 하나만으로 생생하게 다시 기억이 난다. 이럴 때엔 아직 내 머리가 크게 녹슬지 않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 현재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메리 크리스마스 다. 유럽 여러 국가들의 합작 영화이고, 다이앤 크루거가 나온다. 2차 대전 도중 실제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영화인데, 서로 대치중인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 크리스마스를 사이에 두고 잠시 동안의 휴전이 성사되고, 그 기간중 서로 재미있게 놀며 추억을 만들었다는 얘기. 하지만 그 추억들이 각국의 가족들에게 편지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각국 수뇌부에 보고가 되고, 결국 그 잠시동안의 평화를 이끌었던 이들은 고통을 겪게 된다는, 씁슬한 결말도 함께 가지고 있는 영화. 나는 그 영화를 크리스마스 이브에 봤다. 제목때문에 찾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정작 영화는 크리스마스에 볼만한 영화는 아니었다. 나는 그 영화를 헤어진 여자친구와 함께 시네큐브에서 봤고, 그 영화는 결국 그 친구와 함께 본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맞나?) 그 영화를 볼때 이미 우리는 헤어진 상태였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헤어진 여자친구들과도 참 잘 만났던 것 같다. 한사람만 빼놓고.. 여튼, 한 겨울 광화문 네거리는 참 좋았다. 그 누구와 걸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 그런 쌀쌀함과 건조함을 머금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영화를 봤고, 미스터 도넛을 사서 먹었으며, 273번을 타고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광화문에서 홍대 서교 호텔앞까지 함께 갔다. 그 친구는 아마도 검은색 코트속에 짙은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을 것이고, 부츠를 신었을 것이다. 손에는 루이 비통 헨드백이 들려져 있었겠지. 나는 그때 머리가 짧았고, 자켓을 즐겨 입었다. 목도리를 했을 것이고.

기억은 변질되게 마련이다. 그 변질의 정도가 심해지면 치매가 되는 것 같다. 나의 기억도 조금씩 변질되고 지워지고 있을 텐데, 익숙한 영화 제목을 봐도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 오면 그때가 나에겐 치매일 것 같다.

Pearl Jam – the Fixer

미국에 와서 적지 않은 수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데스 캡 포 큐티같은 거물급부터 플릿 폭시스같은 신성들의 새파란 무대까지. ‘한물 간’ 뮤지션들이 아닌, 동시대에서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뮤지션들의 생생한 투어의 현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일종의 행운이었다. 이제 11월에는 픽시스의 공연을 보러 갈 텐데, 그 전에 펄잼의 신보가 나왔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정말 꼭 보고 싶은 공연 중 하나가 펄 잼의 공연이다.

그런 그룹들이 몇 있다. 신보가 나오면 그저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넙죽 엎드려 받아 모셔야 하는. 나에게는 디페쉬 모드, 펫 샵 보이스, 알이엠, 그리고 펄잼이 그런 ‘분들’ 이다. 음악적 성취도나 음악씬에 미치는 파급효과같은 건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나의 유년 시절을 장악했던 사람들이 동시대에서 음반을 발매해 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펄 잼에 대한 추억은 사실 그리 깊지 않다. 남들과 비슷한 정도인 것 같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No Code 앨범을 가장 좋아했다는 점 정도? 그 이전 앨범들에 열광했고 그 이후 앨범들에 엄청 실망했다는 건 남들과 같다. 구입하지 않은 앨범도 있었고, 구입하고서 제대로 듣지도 않고 내팽개쳐 둔 앨범도 있다. 10대 시절 음악에 열광했던 그 무렵 펄잼도 전성기를 구가했고, 음악을 듣는 귀가 꽤나 좁아져 폐쇄적일 정도가 됐던 20대 초중반 시절엔 그들도 함께 부침을 겪었다. 이제 조금은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감을 잡을 나이가 되니, 이들도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나 보다. 이렇게 내 일생의 고저를 함께 겪는 뮤지션들은 그들이 성취한 음악적 결과물과는 상관없는 개인적 애정이 존재하게 되는 것 같다.

이 뮤직비디오는 espn 에서 풋볼을 중계해줄 때 중간 커머셜로 자주 나온다. 경기 하일라잇과 함께 믹스되어 나오는데, 참 반갑기도 하고 뭐하기도 하고.. 그렇다.

일곱번째 파도, by Daniel Glattauer

– 스포일러 있습니다. 많습니다.

-오늘 아침에 소포를 확인하고, 단단히 싸여진 봉투째 학교로 들고와 가위 없이 우격다짐으로 뜯고서는 두시간을 꼬박 도서관 의자에 앉아 읽었다. 어찌 그리 포장을 꼼꼼이 하셨는지, 뜯다가 손톱 빠질 뻔 했다.

– 음, 이건 ‘official’ 감상문이다.그렇게 보이도록 쓸 것이다.

– 우선, 다시 만나게 된 에미와 레오가 무척 반가웠다. 이건 나뿐만이 아닐테지.에미는 내가 최근 몇년간 만난 그 어떤 픽션상의 여자들 보다 매력적이다. 용감하고, 재치있으며, 신중하고, 무엇보다 착하다. 솔직하고, 당돌하며, 깨끗하다. 레오뿐 아니라 나 역시 그녀를 꼭 한번 직접 만나고 싶었고, 간접적으로나마 그 소원을 성취했다. ‘만나고 나니 더 좋았다.’ 라는, 인터넷상의 만남을 현실로까지 가져갔을때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난제를 해결했을 때의 쾌감을 아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었을 때, 우리는 에미가 왜 그렇게 머뭇거리고 수줍어 했어야만 했는지, 왜 그녀가 보내는 엄청난 에너지의 이메일들을 그녀의 실제 얼굴에서 확인할 수 없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나는 에미가 참 좋다. 그리고 왜 그녀가 이메일에 그토록 집착하는지도 잘 이해하고 있다. 이메일상에서 항상 유쾌하고 적극적이며 솔직하고 직선적이었던 그녀가 왜 가장 중요한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할때 ‘일곱번째 파도’ 라는 극단적인 비유를 들어야만 했는지는, 그녀의 수줍은 얼굴을 보았다면 아마 바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실제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레오는 정말 연애에는 꽝인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속으로 깊숙히 파고 들어가 버린 남자가 정작 말단 신경들의 자극들만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둔감해 지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그리고 이런 류의 남자에게, 뜨거운 가슴과 그보다 훨씬 낮은 온도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여자가 흠뻑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도 자명한 사실.

– 구성은 전작에 비해 빈약하고 지루하다. 그리고 예측 가능하다. 예측 가능하다는 건 <새벽 세시> 와 이 작품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된다. 우리가 <새벽 세시> 를 실제로 새벽 세시가 될 때까지 놓지 못하고 계속 읽어야만 했던 이유는 모든 것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레오와 에미가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과정을 우리는 고스란히 함께 겪어야 했다. 바로 다음장에 어떤 말들이 오고 갈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숨막히는 상황 속에서 놀라운 수준의 수다와 함께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침착함을 보여주는 두 주인공에 전적으로 기댈 수 밖에 없었다. 결코 만날 수 없기에,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절대 명제가 너무 강렬했기에 이 소설의 마지막은 오랜 여운을 남길 수 있었다. 저자 후기도 역자 후기도 없는 이 속편의 한국판에서 유일하게 유추할 수 있는 건 독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는 ‘후일담’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원한듯 하고, 결국 이는 여러가지 ‘무리수’로 이어지게된듯 하다. 우리는 이 둘이 어떻게 될지, 처음 몇장을 넘기면서 대충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결국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을 성취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에미가 레오에게 준 ‘기념품’ 을 맞추는 건 너무 단순한 퀴즈라는 생각까지 든다. 예측 가능한 전개가 가져다 주는 다른 폐해는 ‘김빠짐’ 에 있다. 둘이 여러번 만나고, 섹스를 하고, 키스를 하고, 서로를 갈구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분명 흥미롭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흥미롭고 가슴 떨리는 건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 아무튼, 전작과 속편과의 관계를 굳이 비교하자면 <비포 선라이즈> 와 <비포 선셋> 정도가 아닐까. 강렬한 텐션과 결코 잊을 수 없는 엔딩 신, 두 주인공이 가지는 엄청난 매력,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게끔 만드는 현실성 넘치는 냄새들, 그리고 가슴벅차게 타오르는 사랑의 감정들이 <새벽 세시> 를 설명하는 키워드들이라면 <일곱번째 파도> 는 ‘끝’ 과 ‘시작’ 이라는 미묘한 개념들에 대한 정리라는 측면에서 <비포 선셋> 과 흡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나는 분명 두 권 모두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전작이 속편보다 훨씬 재밌었다. 속편은 전작보다 지루하다. 그리고 감정의 밀도가 고르지 못하다. 두 주인공이 흥분할 때 나는 무덤덤하고, 이들이 가라 앉을 때 나는 조바심이 생긴다. 주인공들과 나 사이에서 타이밍과 호흡이 잘 맞지 않는 느낌이다.

– 몇가지 생각들;

‘팜’ 의 존재 – 끊임없이 이어지는 섹스 도중 에미에게 플라토닉한 이메일을 보내는 레오. 그리고 예정된 파국. 소설이라서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에미와는 달리 레오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가져가려 한다.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알고 있던 에미가 훨씬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지.

에미의 가족들 – ‘사랑’ 이라는 하나의 감정을 둘로 쪼개려고 애쓰는 레오와는 달리 에미는 분명하고 철저한 기준 속에 자신의 삶을 두개로 쪼갠다. 혹은, 두개의 다른 성격의 사랑을 쪼갠 걸 수도 있다. 에미에게 있어 가족은 본인이 기꺼이 떠 안고 가는 무거운 짐같은 존재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결국 그녀는 용감하게도 확고한 결단을 내린다. 이유를 찾지 않고, 변명을 생각하지 않는다. 눈앞에 닥친 현실과 지금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에만 충실할 뿐.

카페에서의 대화 – 속편이 전작보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둘이 카페에서 혹은 레스토랑에서 혹은 누군가의 집에서 나눈 대화들을 독자들이 완벽하게 알지 못하게끔 한다는 거다. 전작에서 주인공들의 감정과 생각이 99% 이메일을 통해 형성됐다면 이번에는 한 70%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느낌. 하지만 놀랍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속편은 더 예측가능하다. 노골적으로 주인공들의 외모를 묘사함으로써 어느정도 갈증을 해소시키려 하지만 이 역시 ‘무리수’. 나는 레오가 머리 숯 많은 케빈 스페이시를 닮았다는 사실을 ‘결코’ 알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