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인의 애호박과 ‘당신들의’ 페미니즘

최근 유아인이 SNS 상에서 불특정 다수의 누리꾼들과 벌인 설전이 화제가 되었다. 큰 의미를 부여할 일이 없는 단순한 말다툼이었다면 가쉽란의 한 꼭지를 차지하고 끝났을 일이지만, 사건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마무리까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바람에 조금은 더 거창한 모습으로 비추어져 버렸다. 트위터를 하지 않는 내가 다른 곳들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담배와 트위터는 끊는게 아니라 잠시 참을 뿐이라지만 어쨌든 그쪽 세상에 발길을 끊은지 1년이 넘었다)  유아인을 특정한 한 트위터 계정이 “애호박”에 빗대어 유아인을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들 것 같”은 사람으로 비유했고, 이를 유아인이 직접 인용한 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라고 발언한 것이 사건의 시초였다. 이후 그 트위터 계정이 여성의 소유로 밝혀지며 여성에 대한 언어폭력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고, 유아인이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일이 커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사실 지저분하고 비논리적인 진흙탕 싸움이라 특별히 언급할 가치도 없고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지만, 딱 하나 중요한 사실을 꼽자면 유아인과 그 반대편에서 유아인을 공격한 불특정 다수의 집단 모두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싸움판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말과 글로 먹고 사는 구경꾼들이 달라붙어 유아인의 정신질환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의심하거나 “폭도”라는 단어 등 일부 표현에 천착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차원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그 한 예다.

이 사건에 대한 균형잡힌 시선은 오히려 노동계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의 생각도 앞선 링크와 비슷한 맥락 위에 있다. 유아인을 여성혐오주의로 조리돌림하려는 시도는 부당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언어폭력행위는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과오였다. 그렇다고 유아인이 페미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번 사건에서 유아인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계층은 소위 남초 커뮤니티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활동하는 누리꾼 집단이다. 그리고 유아인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은 계층은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트위터를 중심을 활동하거나 여초 커뮤니티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활동하는 분리된 누리꾼 집단이다. 양쪽 집단 모두 편협된 사고와 부족한 공감능력, 그리고 성급한 일반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성급히 대화상대를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고 경솔하게 무시해버려서도 안된다. 이해와 공감, 설득과 협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아인의 ‘애호박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양성평등, 혹은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직도 많이 상이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갈등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혹은 개념에 대한 이해가 상이하다는 점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이 여성중심주의, 혹은 여성우월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 ‘안에서’ 수정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양성평등을 실현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과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생각을 아우르는 핵심적인 가치는 남성중심의 편향된 사회체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며, 이 핵심 가치 아래 다양한 의견과 입장을 이해와 협의, 논의와 양보를 통해 무리없이 추진해나가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다양한 계층에 의해 상이한 모습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자신과 다르게 이해된 페미니즘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려고 하는 모습까지 보여지고 있다. 소수자 집단 간 연대의식을 거부한채 미러링이라는 방식을 왜곡되게 차용하여 언어폭력행위를 정당화한 일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의 과오를 억지로 껴안으려 한 여성운동권의 책임일 수도 있고, 그들의 일탈행위를 마치 페미니즘의 본질인양 호도하여 여성혐오주의로 맞받아친 남성중심 사회의 과오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양쪽 진영 모두 편협함과 자기중심주의라는 공통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르면 공부하라”는 엘리트주의도 배격해야 할 대상이며,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본질에서 벗어난 비난문구 역시 사라져야 할 논리다.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 어떤 폭력행위도 정당화되어서는 안되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기득권 세력의 자만심과 함께 비판의 주된 대상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소수자는 소수자와 함께 연대해야 하며, 지배세력에 속한 이들 역시 기득권을 내려놓고 그 연대의 선상에 함께 서야 한다. 운동은 반드시 전문적 지식의 습득으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꼭 정체성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공감과 이해, 설득과 합의의 과정을 통해 입장과 직접경험을 초월하여 훨씬 더 폭넓고 영향력 있는 운동이 시작될 수도 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때 창의적인 생각이 샘솟는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말이 된다고 한다. 나의 경우, 샤워할 때 떠오르는 창의적인 생각 중 대부분은 논문의 아이디어와 관련된다. 서울에서 생활하며 듣고 보고 겪은 다양한 사회현상을 잔뜩 얽힌 실타래처럼 집으로 가지고 오면 샤워를 하며 이 경험을 생각의 책장 속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분리해서 보관하는 셈이다. 요즘에는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향상이 미치는 경제적 영향을 어떻게 계량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한다. 물론, 내가 샤워를 하며 떠오른 아이디어 정도라면 이미 몇십년전부터 도서관에 책이나 논문의 형태로 보관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헌할 정도의 지적 생산물이 나오는 과정은 번개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쌓아올린 공고한 지식의 탑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조금씩 기어올라가며 그 흔적을 손으로 더듬어 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식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아주 작은 돌덩어리 하나 정도 더 얹는 것으로 지식 생산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 확대, 혹은 양성평등의 제도적 확대가 거시경제변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은 놀랍게도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경제학계야 말로 남성중심의 편향된 체계가 공고하게 자리잡은 대표적인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 비로소 일부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자료를 사용하여 양성평등 문제를 경제학적 시선에서 바라보는 노력이 행해지고 있지만 아직 미약하다. 평생 먹거리로 삼을 만한 연구주제를 하나 큼지막하게 골라야 한다면, 박사학위 전공에서 살짝 벗어나 사회적 소수자의 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연구에 힘을 보태고 싶다.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 나는 남성이자 이성애자이자 비장애인이자 고학력자이자 서울출생이자 서울거주자이자 아파트거주자인, 소수자로서의 차별 경험을 거의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이런 내가 어디까지 소수자의 입장에 설 수 있는지 드러내는 것은 나 자신의 삶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의미가 아예 없는 실험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피스톤스의 예상치 못한 선전

지난 10년동안 디트로이트 피스톤스(Detroit Pistons)는 ‘세상 재미없는 팀’의 전형이었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고 수퍼스타를 길러내지도, 영입하지도 못했다. 구단의 소유주는 바뀌었지만 구단 운영진의 열정이 되살아난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미시건 지역의 농구팬들은 경기장을 떠나 풋볼이나 하키 경기장으로 떠났고, 그 어떤 경기도 매진되지 않았다. 텅텅 빈 경기장과 4쿼터에 곧잘 따라잡히고 마는 의욕없는 경기력이 지난 10여년 피스톤스를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스탠 밴 건디(Stan Van Gundy)가 새로운 단장이자 감독으로서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ESPN 트레이드 머쉰에 중독되었나 의심이 될 정도로 선수단을 빠르게 갈아엎었다. 수많은 트레이드가 행해진 결과 단기간만에 선수단은 밴 건디가 원하는 선수들로만 채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높은 곳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10년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지난 시즌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 선수는 팀의 주축인 안드레 드러먼드(Andre Drummond)와 레지 잭슨(Reggie Jackson)이었다. 이 둘은 부상과 불화로 팀의 근본을 흔들어놓았다. 지난 시즌이 마무리된 후 이 두 선수가 트레이드 시장에 나왔다는 루머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피스톤스는 다시 무너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예상 외로(?) 드러먼드와 잭슨은 팀에 남았고, 건강하게 트레이닝 캠프를 소화했다. 밴 건디는 드래프트에서 듀크(Duke) 대학의 백인 슈터 루크 케나드(Luke Kennard)를 뽑았다. 팀이 애지중지 키웠던 3-and-D의 전형 캔타비우스 칼드웰-폽(Kentavious Calwell-Pope)을 FA로 떠나보낸 대신 또다른 젊은 육성 선수 스탠리 존슨(Stanley Johnson)과 포지션이 중첩되었던 베테랑  마커스 모리스(Marcus Morris)를 보스턴 셀틱스의 가드 에이브리 브래들리(Avery Bradley)와의 트레이드로 떠나보냈다. 드래프트에서 2번을 뽑고 트레이드로 또 2번을 영입한 행동이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차라리 모리스와 레지 잭슨을 묶어서 더 좋은 1번을 영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밴 건디는 FA로 랭스턴 갤러웨이(Langston Galloway)를 영입했다(!). 샐러리 캡을 장기간 잡아먹는 평범한 선수의 영입은 밴 건디가 보여주는 특기 중 하나다. 이미 팀에는 이쉬 스미스(Ish Smith)가 백업 가드로 자리잡고 있던 상황이었다. 갤러웨이는 2번으로는 너무 작았고 1번으로는 운영능력이 부족했다. 이렇게 또 망하나 보다 싶었다. 요즘 리그가 아무리 가드의 세상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피스톤스는 시즌을 잭슨-브래들리-존슨-토비아스 해리스(Tobias Harris)-드러먼드의 주전 라인업으로 출발했다.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존슨은 슛을 쏘지 못하는 3-and-D, 그러니까 오클라호마 시티(Oklahoma City)의 안드레 로버슨(Andre Roberson)과 비슷한 타입의 선수였다. 0-and-D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했다. 브래들리 역시 3점이 없었다. 잭슨은 지난 시즌 이기적인 모습으로 팀의 화합을 해쳤다. 해리스는 3번에서는 느리고 4번에서는 약한 트위너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드러먼드는 30%대 자유투 성공률로 인해 4쿼터에 코트위에 있을 수 없음을 지난 5년 간 증명한, 반쪽짜리 선수였다. 4쿼터에 뛰지 못하는 드러먼드를 대신해주었던 애런 베인스(Aron Baynes)는 보스턴으로 떠났다. 백업가드 이쉬 스미스는 경기운영만큼 따라주지 않는 슛이 문제였다. 아무리 동부지구가 약해졌다지만 이런 라인업으로는 10,11위 쯤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팀당 약 20경기 정도를 치룬 현재 피스톤스는 13승 6패로 동부지구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정도면 우연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어제 있었던 동부지구 1위 보스턴 셀틱스(Boston Celtic) 원정에서 보여준 경기력은 꽤 인상적이었다. 이 팀이 우연한 성공(fluke)을 거두고 있지 않음을, 생각 외로 단단한 경기력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음을 증명한 경기였다. 시즌 초반에는 지난 시즌 우승팀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Golden State Warriors)를 원정에서 잡아내기도 했다. 시즌 전 수퍼스타들이 한 팀에 모이는 합종연횡이 만연했음에도 불구하고 도깨비팀들이 많이 등장하고 팀간 격차가 해소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미스테리한 시즌이긴 하지만, 피스톤스가 보여주는 시즌 초반의 성공은 근본적인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먼저 변화의 중심에는 드러먼드가 있다. 그의 자유투 성공률은 현재 60%를 상회한다. 폼이 극단적으로 변했다. 가상현실(VR) 장치를 착용하는 등 별의별 우스꽝스러운 시도를 했던 드러먼드는 시즌 전 기간 트레이너 아이단 라빈(Idan Ravine)과의 훈련을 통해 자유투 성공률을 극적으로 상승시키는데 성공했다. 30%대에서 60%대로의 자유투 성공률 진화는 상대팀으로 하여금 더이상 드러먼드에게 고의파울을 범할 수 없게 만들었다. 4쿼터에도 코트 위에서 페인트존을 장악하며 리바운드를 걷어낼 수 있게 되었고, 효율성은 증대됐다. 드러먼드가 코트 위에 더 오래 있을 수 있게 됨에 따라 밴 건디는 그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자유투 라인 바깥에서 공을 잡은 뒤 컷인해 들어가는 스윙맨들에게 공을 공급하는 패서로서의 역할이 그것이다. 덕분에 그의 경기당 어시스트 수치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새롭게 영입된 브래들리의 빠른 움직임 덕분이다. 공을 만져야만 움직이는 게으른 레지 잭슨과 달리 브래들리는 리그에서 가장 빠르게 수비수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선수이고, 이 점이 드러먼드의 볼핸들링 재능과 합쳐져 좋은 작전 몇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브래들리의 이러한 움직임은 리그에 존재하는 빅포워드 중 공없는 움직임(off the ball move)이 가장 좋은 선수 중 하나인 토비아스 해리스와 융합되어 상승작용을 더 크게 불러일으킨다. 마치 2000년대 초중반 피스톤스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던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이 재림한 듯한 모습이다.

브래들리가 팀에 가져다준 긍정적인 영향은 공격 뿐 아니라 그의 큰 장점 중 하나인 수비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단순히 패싱 레인을 차단하고 대인 방어를 성실히 수행하는 차원의 ‘좋은(good)’ 수비수 정도에 머물렀던 칼드웰-폽에 비해 브래들리는 통계수치로 확인되지 않는 ‘훌륭한(great)’ 수비수로서의 모습을 경기 내내 보여주고 있다. 수비면에서의 그의 리더쉽은 역시 ‘좋은’ 수비수 정도로 평가받았던 스탠리 존슨의 수비적 재능을 최대한 이끌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최종 방어선을 담당하는 드러먼드의 부담도 줄여주었다. 결국 전체적인 팀 수비능력 자체가 브래들리로 인해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애런 베인스를 대체하기 위해 영입된 에릭 모어랜드(Eric Moreland)가 리바운드와 허슬에서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해주고 있는 점도 수비면에서 긍정적인 요소다.

공격면에서는 해리스의 성장과 이쉬 스미스의 에너지가 눈에 띈다. 해리스는 데뷔 후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몸은 한결 가벼워 보이고 3점 라인 바깥에서 충분히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번과 매치업되면 몸으로 밀어 버리고 4번과 매치업되면 가볍게 제쳐버린다. 공 없는 움직임이 워낙 좋다보니 수비가 따라오지 못하는 상황도 자주 연출된다. 단순히 올시즌 몸상태가 좋아서 반짝한다고 하기엔 3점슛의 정확성이나 골밑에서의 마무리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 눈으로 확인된다. 더 좋은 선수가 된 것이다. 그는 아직 25세에 불과하다. ESPN의 잭 로우(Zach Lowe)가 최근 팟캐스트에서 이야기했듯 때때로 젊은 선수의 성장곡선은 신인 계약기간이 끝난 뒤에도 급격하게 상승하기도 한다. 해리스가 좋은 예이다. 이쉬 스미스는 벤치에서 힘을 충분히 보태고 있다. 올시즌 슈팅능력이 많이 좋아지면서 여전히 비효율적인 레지 잭슨을 적절히 코트 밖으로 밀어내고 충분한 출전시간을 확보하였다. 현재 피스톤스가 10점차 이상 뒤쳐졌을 때 이를 따라잡고 역전시킨 경기가 리그에서 가장 많은데, ‘추격조’의 선봉에 서서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수행하는 선수가 바로 이쉬 스미스다. 정적인 공격에 특화된 레지 잭슨의 적절한 대체재로 기능하는 셈이다.

레지 잭슨은 여전히 레지 잭슨이다. ‘건강한’ 잭슨이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잭슨의 스타일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플레이오프 진출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와 이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공격에서 리그 최정상급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수비에서 구멍과도 같은 짐이 되고 있다. 그의 클러치 능력은 과대평가되었다. 경기 내내 말아먹어서 따라잡히다가 막판에 빅샷 한두개 터뜨린 뒤 좋아하는 모습에 속에서 열불이 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밴 건디에게 잭슨은 올랜도 매직(Orlando Magic) 시절 자미어 넬슨(Jameer Nelson)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슈터에게 적절한 시점에 공을 공급하고 빅맨과의 투맨게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우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그의 흐름은 그 당시와 달리 코트의 각 구역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포지션의 구분 역시 급격하게 파괴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포인트 가드는 공을 운반해야 할 의무에서 벗어난 대신 적극적으로 골밑을 공략하고 빅맨과 스위치되어도 밀리지 않고 살아남아야 하는 임무를 새롭게 부여받게 되었다. 잭슨은 최근 흐름과 상반되게 지나치게 공을 오래 소유하고 독점하려는 경향이 있고, 힘이 그리 센 편도 아니다. 이런 유형의 선수로 리그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워싱턴(Washinton Wizards)의 존 월(John Wall) 정도는 되어야 한다. 잭슨의 이러한 성향은 슈터들의 움직임을 최대치로 살려내지 못하고 빈 공간을 적절하게 찾아내지 못하게 만든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잭슨은 피스톤스의 가장 큰 불안요소라고 할 수 있다.

시즌의 중반을 통과한 지점에서 피스톤스가 여전히 동부지구 상위권에 위치할 수 있을까? 드러먼드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자유투 성공률 60% 이상을 기록할 수 있을까? 레지 잭슨의 무릎은 언제쯤 다시 주저앉을까? 루크 케나드와 스탠리 존슨은 언제쯤 효율적인 슈터로 발전할 수 있을까? 언제쯤 우리는 헨리 엘렌슨(Henry Ellenson)이 앤소니 톨리버(Anthony Tolliver)를 제치고 벤치에서 처음 나오는 포워드가 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을까(언제적 톨리버냐 대체 언제적!)? 이 팀에는 여전히 의문부호가 가득하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도 현재와 같은 팀의 선전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며, 이러한 팀의 발전이 우연이 아니라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4쿼터까지 끈끈하게 달라붙는 모습을 시즌 마지막까지 보여준다면 5할 승률 이상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치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관건은 드러먼드를 얼마나 코트 위에 오래 세워둘 수 있을 것이냐, 3점 라인 밖에서의 효율적인 슈팅 관리가 지속적으로 가능할 것이냐, 이쉬 스미스 외에 벤치에서 나와 흐름을 바꾸어줄 디퍼런스 메이커(difference maker)가 존재하느냐 정도로 보인다. 어쨌거나 이 팀이 예전보다 훨씬 재미있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세상 재미없는 팀’에서 꽤 주목해서 보아야할 팀 정도로 성장한 느낌이 들어 뿌듯하다.

면접에서 깨달은 것들

어제 개인 사정으로 잠시 반차를 내고 일을 본 뒤 짬을 내어 면접을 하나 봤다. 민간그룹 산하 연구소였다. 발표를 잘 하지는 못했다. 많이 더듬거렸고, 중간에 내용을 까먹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한 것도 많았다. 어제 집으로 돌아와서 잠들 때에도, 오늘 아침에도 계속 어제 면접에서 실수한 것들이 떠올라 스스로를 자책했다. 면접 당사자가 이렇게 명확하게 인지할 정도면 심사위원들은 바닥까지 훑어 내려갔을 것이다. 이미 떨어진 것은 기정사실처럼 느껴진다.

면접의 실패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관건은 왜 실패했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우선 어제 와이프가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절실함이 없었다. 대학원을 졸업할 당시 첫직장은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곳에 취직하지 못하면 실업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타는 듯한 절실함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올해 초 첫직장에서 나올 때에도 그에 못지 않게 절실했다. 연구를 더이상 지속할 수 없는 환경에서 마치 생명줄이 끊어진 듯한 비참함을 느꼈고, 지금의 직장에서 뜻밖의 오퍼가 왔을 때 하나의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한번의 취직과 한번의 이직과정에서 ‘플랜B’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직장에 들어가거나 더 나빠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번에는 케이스가 조금 달랐다. 우선 현 직장이 나를 죽일 듯이 괴롭히지는 않는다. 이 직장이 보여주는 비전이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고 고용도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어디론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적당한 업무량 사이를 비집고 열심히 짬을 내면 개인연구도 어느정도 할 수 있다.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봉급과 계약직이라는 신분이 마음 한켠에 늘 불안감을 갖게 하지만, 어차피 평생직장은 아니라는 생각에 미래를 위해 꾸준히 연구성과를 쌓는다면 어디로든지 갈 곳이 없겠냐는 낙관적인 생각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정말 내가 원하는 직장에서 면접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는 어제와 같이 안일한 자세로 임하면 안되겠다고 느꼈다. 왜 면접을 보는지, 왜 이직을 원하는지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본 어제의 면접은 생명력을 잃은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심사위원들에게 절실함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어필은 없을 것 같다.

이와 함께 아직 나의 내공이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다시 한번 느꼈다. 심사위원들의 질문은 내 발표를 듣다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상식 수준의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황한 나머지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제 밤 샤워를 하면서 그 질문들이 다시 떠올랐고 충분히 괜찮은 답변도 함께 떠올랐다. 좋은 답변을 그 자리에서 즉시 할 수 없었던 것은 단순히 순발력 부족에 따른 불운의 문제가 아니라 평소에 충분히 학문적인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인 참사였다. 책장 한켠에는 아직도 배달되어 온 학술지들이 포장도 뜯겨지지 않은채 쌓여 있다. 공부를 게을리 하는 학자는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곡학아세를 하던가 룸펜이 되던가 해야 한다. 나는 둘 다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을 조리있게 하되 그 말이 세상에 인정을 받고 선의를 의해 쓰이는 모습을 경험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공을 더 많이 쌓아야 한다. 그 내공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좋은 논문을 써야 한다. 퇴근 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아이돌 방송을 보고 있을 게으름 따위는 아직 허락되지 않은 것 같다. 그 사이 또 많이 나태해진 것이다. 이번 면접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다잡아야겠다. 2018년 이맘때에 똑같은 후회를 다시 하게 된다면, 그 때에는 정말 더이상 발전이 없다는 절망감을 현실로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켄지 요시노: 커버링

커버링
사회적으로 보호해야 할 소수자 집단 중 대표성을 가지는 집단을 꼽아보자면 여성, 장애인, 소수인종, 성적소수자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어느 나라에나 반드시 존재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완전히 평등한 대우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동성애자 결혼이 합법화되고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금지법이 강화되는 등 국가에 따라 이들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가 선진화되는 흐름을 엿볼 수 있지만, 한국을 비롯한 많은 사회에서 이들 소수자 그룹은 아직도 다양한 차원의 차별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소수자에 대한 ‘보호’와 ‘차별’의 개념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소수자 집단에 대한 보이지 않는 억압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화, 또는 진화해왔는지 관찰하는 작업은 소수자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한다는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켄지 요시노는 일본 출신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아시아인이었던 요시노는 미국에서 정규교육을 받았지만 부모의 방침에 따라 방학마다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문화도 익혀야 했다. 다문화 사회에서 소수인종이 받는 차별보다 요시노에게 개인적으로 더 중요했던 것은  성적 정체성 문제였다. 남들과 다른 성정체성을 부모를 포함하여 그가 속한 사회에 고백하는 과정에서 그는 집단 내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후 하버드, 옥스퍼드, 예일 등에서 수학한 뒤 성공한 법학 교수이자 유명 소수자인권 활동가로 살아오며 요시노는 소수자의 민권을 억압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폭력에 천착하게 되었고, 그 고민의 결과를 일반 대중을 위해 쉽게 풀어쓴 첫번째 저작이 바로 [커버링]이다.

이 책에 따르면 ‘커버링(covering)’은 비주류, 혹은 소수로 낙인찍힌 개인에게 사회가 가하는 억압의 세번째 단계다. 첫번째 단계는 ‘전환(conversion)’의 요구다. 비교적 최근까지 동성애는 의학계에서 정신질환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동성애가 치료 가능한 대상이라는 의미였기에 당시 많은 동성애자들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성애자로 전환되는 ‘치료’를 받아야 했다. 동성애 행위는 불법으로 인식되었고 동성애자들은 공개적으로 처벌받았다. 이후 의학계를 중심으로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사회는 동성애자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존재의 인식’까지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억압의 두번째 단계는 그래서 ‘패싱(passing)’이다. 최근까지 논란이 되었던 미군내 규율인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규정이 대표적인 패싱 사례다. 이는 군내 동성애자를 식별하기 위한 공식적 조사행위를 금지하되,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군인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감수하라는 규정이다. 패싱은 주변에 소수집단이 존재함을 알고 있지만 그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욕망의 그릇된 발현인 셈이다. 이 패싱으로 인해 많은 소수자들이 명시적인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법은 최근까지 이 패싱을 옹호해 왔다. 이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거세지고 소수자들의 집단적 행동과 이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더해져 소수자들이 다수자들과 명시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태어난 세번째 억압의 단계가 바로 커버링이다.

커버링은 조금 더 교모한 형태로 행해진다. 소수자를 명시적으로 차별하지 않지만, 소수자로 하여금 그가 속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동화되기를 강요한다. 노멀(normal) 동성애자와 퀴어(queer) 동성애자 집단 간 논쟁이 좋은 예다. 노멀 동성애자는 동성애자 간 결혼의 합법화를 지지한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관습을 차별없이 동등하게 누리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쪽이다. 퀴어 동성애자는 역사적으로 결혼은 이성애자 간 결합을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편향된 사회적 장치로 기능해왔으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성애자만의 사회적 표현이 존재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쪽이다. “너는 참 여성스럽게 행동하는구나. 자연스러워”와 같은 말도 커버링을 강요하는 폭력의 한 형태가 된다. ‘여성스러움’을 은연중에 강조함으로써 여성이라는 소수자의 고정관념을 떠안기를 강요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커버링의 사회적 결과는 조직 내 관리자급 이상의 직위를 획득한 여성 중 상당 비율이 출산 경험이 없다는 통계 자료에서 잘 드러난다. 사회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출산을 포기해야 하며, 이렇게 출산(‘여성의 고유한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낮은 단계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주장 역시 그래서 커버링의 한 형태가 된다. 아이를 낳고 낳지 않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영역에서 결정될 사안이다. 그리고 그 결정과정에서 사회적 억압이 존재하면 아니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소수자 개인과 그가 속한 다수자가 지배하는 사회 사이에 맺어지는 불평등 계약관계를 조망하며 다양한 판례를 예시로 제시하고 있다. 미국 판례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아주 가끔 일본의 판례도 등장하긴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현재 더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정에 법적장치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 긴장관계를 완화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지는 확실히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방식을 통해 논리전개과정을 보다 쉽게 전달한다. 그의 경험과 판례를 번갈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전환-패싱-커버링으로 이어지는 억압의 세 단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는 빈약하다. 2006년에 처음 발표된 이 책에 이어 요시노는 2016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세번째 책인 [Speak Now: Marriage Equality on Trial]을 발표했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 젠더 이슈를 조금 더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나 싶다. [커버링]은 소수자 개인에 대한 사회적 억압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다수자를 위한 책이다. 체험하지 않았기에, 체득하지도 못한 다수자는 광범위하게 행해지는 이러한 폭력행위에 대해 최소한 글을 통해서라도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 소수인종에 대한 멸시, 여성에 대한 억압, 장애인에 대한 무시가 너무나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는, 소수자 민권의 사각지대와 같은 나라다. 다수자들의 반성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커버링]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적으로 아주 잘 쓰인 책이다.

Mogwai: Every Country’s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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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혹은 한번이라도 들어본 모과이(Mogwai)의 음반을 세어보았다. 대충 짐작해보아도 8,9장 정도는 넉넉히 들어본 느낌이다. 모과이는 단 한번도 나의 ‘최애’ 뮤지션이었던 적이 없다. 포스트록으로 장르를 국한지어도 항상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이나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Explosions in the Sky)의 이름이 이들 앞에 먼저 나왔다. 심지어 모노(Mono)의 음반 몇 장을 더 인상깊게 들었다고까지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과이보다 더 많은 수의 음반을 내 선반에 꽂게 만든 동시대 뮤지션은 찾기 힘들다. 상 중 으뜸상이 개근상이라고 했던가. 모과이는 내가 음악을 처음 듣기 시작하던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진 적이 없었다. 내 음악듣기 인생의 개근상같은 밴드다.

이들은 4,5년에 한 장씩 음반을 발표하는 천년기념물같은 밴드가 아니다. 2년, 아니 어쩌면 1년에 한장씩 새로운 음반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첫번째 정규음반 [Young Team]을 1997년에 발표한 뒤 20년 가까이 활동을 한 이 스코틀랜드 출신 밴드의 모든 정규음반 수는 (라이브 음반과 영화음악까지 합치면) 16장에 이른다. 보통 음반을 준비해서 발표하고 투어를 돌면 2,3년의 시간은 훌쩍 지나기 마련이다. 거기에 개별적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개인활동을 하게 되면 음반과 음반 사이 간격이 4,5년씩 벌어지는 것도 그리 비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모과이는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근면성실하게 음악을 만들어왔다. 정말 놀라운 점은 그렇게 정력적으로 많은 음악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모과이의 음악을 꾸준히 들어 왔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 음반을 매년 발표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구매목록에서 쉽게 삭제되지도 않는다. 늘 구미를 당기는 음악을 만들어내고 또 실제로 지갑을 열어 이들의 새 음반을 구매하게 만든다.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정도 수준의 창작력을 꾸준히 보여주었던 뮤지션이 얼마나 있나 세어본다면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모과이는 최근 새음반 [Every Country’s Sun]을 발표했다. 영화음악을 제외하면 2014년작 [Rave Tapes]이후 3년만이다. 밴드의 첫 출발부터 함께 했던 기타리스트이자 주축 멤버였던 존 커밍스(John Commings)가 탈퇴한 이후 발표하는 첫번째 음반이기도 하다. 무언가 큰 변화가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과이의 열렬한 팬이 아닐 것이다. 20년동안 모과이는 늘 모과이의 음악을 해왔다. 슈게이징의 끝물이 세상을 휩쓸 때에도, 핌프록같은 선정적인 음악이 세상을 지배할 때에도, 말랑말랑한 기타팝이 인디씬을 휩쓸 때에도 모과이는 모과이의 음악을 해왔고, 모과이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해왔다. 이번 음반에서도 마찬가지다. [Hardcore Will Never Die, But You Will] 이후 조금씩 감지되어 온 새로운 ‘리듬’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모과이 음악이 주축으로 자리잡은 것 정도가 표면적으로 느껴지는 변화라고 할 수 있지만, 1997년 데뷔 음반의 질감을 떠올리게 하는 트랙이 발견될 정도로 이들이 유지해온 고유한 감정, 혹은 음악적 공간감은 일정한 수준 안에서 잘 간직되어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꾸준함이 정체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 이들의 위대함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음반은 ‘올해의 음반’ 목록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의 파괴력은 없다. 하지만 모과이의 오랜 팬들의 귀를 즐겁게 할만한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도 별다른 고민없이 지갑을 열었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었다.

Joshua Redman & Brad Mehldau: Near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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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소포니스트 조슈아 레드먼(Joshua Redman)과 피아니스트 브래드 멜다우(Brad Mehldau)의 협연은 90년대 초반 레드먼 쿼탯 투어에 멜다우가 참여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이 두 명의 음악가는 우정을 나누어오며 서로에 대한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2011년 본격적으로 하나의 팀을 이루어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들의 음악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Nearness]는 두 재즈 음악가의 유럽 투어 실황을 녹음은 라이브 음반이다. 스페인, 스위스, 독일, 노르웨이, 네덜란드에서 가진 공연에서 연주된 음악들이 실려있다.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의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 곡들도 들어있고 두 음악가가 직접 작곡한 현대적인 노래들도 들어있다. 재즈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나조차 이 두 음악가가 공연에서 성취한 경지가 매우 높은 수준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음반을 듣다 보면 레드먼과 멜다우가 연주를 통해 매우 재미있고 치열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멜다우가 리드미컬한 피아노 연주를 트랙을 열면 레드먼이 격렬한 섹소폰 연주로 회답한다던지, 레드먼이 작곡한 섹소폰 위주의 트랙에 멜다우가 자신만의 색깔로 피아노 소리를 덧칠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이들의 연주는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몇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지겹지 않고, 거기에 더해 몇번을 더 반복해서 듣고 싶게 만든다.

마이크 밀스: 우리들의 20세기

우리들의 20세기
[비기너스] 이후 마이크 밀스가 내놓은 새로운 영화 [우리들의 20세기]는 [비기너스]에서  단단하게 구축된 밀스의 영화적 세계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1979년 산타바바라를 배경으로 세명의 여성과 두명의 남성이 한 집의 공간을 나누어 쓰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노산으로 늦게 출산한 아들을 홀로 키우는 중년여성의 집에 세들어 사는 젊은 사진작가, 늙은 자동차 수리공, 그리고 그녀의 아들을 짝사랑하는 소녀가 만들어내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웃기지만 어쩌면 슬프기도 한 에피소드를 어렵지 않은 언어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독백을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나가거나 서사가 흘러가는 와중 몽타주 기법의 사진 활용법 등 감독 특유의 영화적 언어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눈부시도록 쨍한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온화하게 담아내는 따뜻한 화면과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서 어깨가 약간 처진 등장인물의 뒷모습을 세심하게 포착해내는 감독의 마음씀씀이도 여전하다. 3,40년대 재즈음악에 대한 감독의 여전한 애정에 더해 이번 작품에서는 70년대말 펑크씬에 대한 감독의 취향까지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블랙 플랙보다는 토킹 헤즈다!)

앞서 말했듯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세계는 전작에 비해 조금 더 넓어졌다. [비기너스]를 관심있게 본 사람이라면 마이크 밀스가 가지고 있는 여성성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놓치지 않았을텐데, [우리들의 20세기]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여성성과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전작에서 게이 아버지를 둔 주인공의 회상씬에 잠깐씩 등장하며 묵직한 여운을 남긴 주인공의 어머니가 이번 작품에서는 진짜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부여받아 활약하는 느낌이다. 전작이 마이크 밀스의 자전적 작품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의 20세기]는 밀스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그가 겪은 여성의 다양한 이미지를 20세기라는 특정 시대에 투영하여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포스터에 등장하는 세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녀들을 경험한 어린 남자가 여성을 알아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한때 히피로 살며 자유주의를 만끽했지만 여성과의 진실된 교감에 실패하여 결코 그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늙은 남자가 인생을 정리해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는 모든 주요 등장인물이 독백에 참여한다. 과거회상임을 전제로 다양한 인물의 입을 통해 발화가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자는 마이크 밀스 한명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남성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아마도 영화의 개별요소를 차별하지 않는 솔로몬적 공평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본인의 이야기를 여러 인물들의 여러 상황에 맞게 변주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때문에 이 영화는 관객에 따라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고 어린 남자아이의 성장기로도 읽힐 수 있으며 20세기 미국사회를 관통하는 시대극으로도 읽힐 수 있다. 하나의 텍스트가 다양한 층위에서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로 흥미롭다.

아네트 베닝, 그레타 거윅, 엘르 페닝 등 배우들의 연기도 무척 뛰어나다. 배우와 늘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데 능한 감독이니만큼 이번 영화에서도 배우의 연기는 발군이다. 글을 적다 보니 감독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해서 감독에 대한 찬양으로 끝나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러운 마음도 드는 것이 사실인데, 최근 몇년 간 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 중 하나가 [비기너스]여서 그런지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 것 같다. [우리들의 20세기]도 무척 좋았다.

정지우: 침묵

침묵
[침묵]은 원작이 있는 영화다. 원작의 스토리라인을 충실히 따랐다고 한다. 두 번 정도 등장하는 반전이 영화의 주된 셀링포인트는 아닌 셈이다. 결말의 묵직한 한 장면을 위해 구성요소의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이 영화가 내세우는 마지막 ‘한방’은 뜬금없는 부성애다. 사랑하는 여자가 갑자기 사망하고 유력한 용의자로 하나뿐인 딸이 지목된다. 인생의 큰 위기에 봉착한 주인공이 가진 유일한 무기는 세상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막강한 재력으로 보인다. 영화는 권력에 아부하고 진실을 왜곡시키기 위해 애쓰는 그의 낮은 모습을 강조하지만, 결말 부분에 이르러 그 모든 과정이 애인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지켜내려는 남자의 고귀한 희생을 위한 장식품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버지’와 ‘애인’은 현대를 살아가는 건조한 한국 남성에게 부여되는 가장 애틋한 역할이다. 이 두 지위를 낭만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마지막 몇 장면이 존재하고, 영화의 서사구조는 이 몇장면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비틀거린다. 설정은 억지스럽고 등장인물의 성격은 서사를 의해 종종 희생되어 일관성을 상실한다. 박신혜가 연기한 변호사 역이 특히 그러하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서사구조를 부분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주인공 남성을 연기한 최민식이나 류준열의 연기는 일차원적이고 식상하다. 오히려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대상화되는 두 여인, 애인과 딸을 연기한 이하늬와 이수경의 연기가 뛰어나다. 비록 그 좋은 연기력이 그릇된 서사를 위해 낭비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영롱하게 빛나는 순간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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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페미니즘 이론가인 벨 훅스(bell hooks)가 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이론의 개론서라기 보다는 페미니즘 운동의 선언서(manifesto)처럼 읽힌다. “페미니즘은 ~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라는 분석적 문장보다는 “남성은~ 여성은~ ~해야 한다”의 형식을 갖는 정언명령적 신념이 느껴지는 문장이 훨씬 많이 존재하는 책이다. 아마도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게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라는 정의로부터 출발하여 이 정의를 확장시키는데 집중하는 이 책이 가진 태생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하나의 ‘운동’에 대한 개괄서로 충실히 기능하고 있다. 때문에 학문적인 엄밀성, 혹은 중립성을 이 책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수필에 가깝게 읽힌다. 먼저 벨 훅스가 주장하는 페미니즘이 이룩한 대부분의 성취는 아무런 자료로 뒷받침되지 않고 오로지 훅스와 그 주변 사람들의 경험에 의존한다. 주장에 대한 근거를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학자로서 벨 훅스가 받는 대부분의 비판 역시 이러한 모호성에 기인하고 있다. 그녀의 책에는 주석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학문적 전문용어(jargon)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최대한 많은 대중에게 읽혀지기 위해서” 이러한 글쓰기 방식이 고수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녀의 책을 읽는 대중의 수준을 – 전문용어의 장벽을 넘을 수 없을 정도로 – 낮추어 보는 것 아니냐는, 즉 학자적 엘리트주의의 기형적 발현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학문적 전문용어는 미세한 차이조차 뭉뚱그려 대충 넘어가지 않으려는 학자적 완고함에 기인할 뿐이다. 상아탑에 스스로를 가두고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어쩌면 이제 주류 페미니즘 학계에서 비주류로 밀려난 노학자가 더이상 동료 학자를 상대로 글을 쓰지 않고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가장 손쉽게 택할 수 있는 옵션이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혁명적 페미니즘’의 시선에서 쓰였다. ‘개혁적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도, 혹은 남성중심주의와 함께 이 책에서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저자와 다른 생각을 가진 페미니즘 운동은 “기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페미니즘의 실천은 상호성의 토양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사회운동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이 무색해지는 순간을 자주 마주치게 될 정도로 적대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어쩌면 페미니즘이 가진 한계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차별주의’ 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정의된 벨 훅스의 페미니즘은 반대하는 대상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상대적 개념에 가깝다. 혁명적 페미니스트는 현 체재를 전복시키고 페미니즘에 근거해 새로운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유토피아적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교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더 나아가 혁명적 페미니즘이 반대한다는 ‘성차별주의’에 대한 정의, 혹은 자세한 묘사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 역시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반대할 대상이 구체적일수록 목적은 분명해지고 공격은 정교해진다. 성차별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자세히 알기도 전에 선동적 문구에 의해 고무를 당하면 어리둥절해질 뿐, 쉽게 몸과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혀질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세계에 만연해 있고 우리나라에도 뿌리깊게 박혀있는 부조리한 남녀 불평등 구조를 깨기 위해 페미니즘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 사회적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페미니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보다 존재하는 세상이 훨씬 더 살만하다는 생각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들이 오늘도 고군분투하며 유리천장에 머리를 찧고 있다. 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은 세상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남녀 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는 좋은 프리즘으로 작동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벨 훅스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신념은 페미니즘이 자만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주는 좋은 채찍질과도 같다. 페미니즘은 계급투쟁과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거친 서구사회가 투쟁 속에서 노골적인 남녀차별을 경험한 뒤 발생한 역사적 부산물이다. 때문에 백인, 중산층, 지식인에 의해 초기 페미니즘이 주도될 수 밖에 없었고, 노동계급, 유색인종, 저학력계층은 초기 페미니즘 운동에서 주변에 위치할 수 밖에 없었다. 벨 훅스는 초기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던 계급적, 인종적 한계를 극복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페미니즘은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 현 시대에 당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안, 혹은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마지막 두 장에서 ‘영성’과 ‘교육’으로 성급히 결론내릴 때 힘이 약간 빠질 정도였다) 그 대신 벨 훅스와 그 주변인들이 성취한 운동의 성과물을 나열하고 그 결과 훅스가 갖게 된 신념의 뿌리가 무엇인지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훅스의 이론 자체가 페미니즘의 역사와 함께 한다면, 그녀가 가진 페미니즘에 대한 신념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페미니즘 운동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another step, although if it’s very small

몇개월 전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잡는 차워에서 일기를 하나 쓴 적이 있다. 이후 여전한 게으름과 두려움으로 인해 논문작업은 차일피일 미루어졌지만, 어찌어찌 하다 보니 나름의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 우선 한국학술등재지에 논문 한편을 게재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 논문 역시 박사학위 졸업논문을 각색한 것이다. 여름 내내 이 논문을 다시 펼치지 못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다 데드라인을 미루고 또 미뤄서야 겨우 수정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고, 지난 등재지 게재 과정과 비슷하게 수정본을 제출한 뒤 불과 사나흘만에 게재 확정 소식을 들었다. 수정 확인 작업을 레프리가 꼼꼼하게 하는게 아니라 편집위원장이 레프리의 사전동의를 구해 게재 확정 여부를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쨌든, 나의 2017년 실적은 논문 세 편이다. 그 중 국내학술등재지는 두 편.

‘포인트를 쌓기 위한 삶은 살지 말자’라고 다짐했지만, 논문 실적, 혹은 포인트라는 것은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쌓이기 마련이다. 내가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 연구 성과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이기도 하다. 나의 2017년은 과거 박사학위 시절 공부한 바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이었다. 이에 더해 전 직장에서 새롭게 관심을 가진 분야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을 정리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제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전 직장에서 발굴한 새로운 먹거리를 논문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클라우드 드라이브에는 국내 등재지에서 거절당한 질 낮은 논문 두편과 아직 밖으로 꺼내 놓지 않은 거친 초고가 하나 있다. 이 중 한 편은 빠른 수정을 거친 후 최근 학술등재후보지로 격상된 전직장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 내볼 생각이고, 다른 (거절당한) 논문 한 편은 조금 더 장기적인 계획 하에 완전히 뜯어고칠 생각이다.

시간상 가장 먼저 작업에 들어갈 논문은 거친 초고 상태의 논문인데, 왜냐하면 이 논문의 ‘가능성’이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학술지”, 혹은 우리가 SSCI(Social Science Citation Index)라고 부르는 목록에 포함된 학술지에 도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등에서 실시하는 국내 대학평가에서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국제 학술지에 논문이 얼마나 기재되는가, 또 그 논문이 얼마나 인용되는가, 라고 한다. 서울에 위치한 한 사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SSCI급 논문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만이 오직 중요할 뿐 국내등재지 논문은 포인트를 채우기 위한 수단 밖에 안된다고까지 이야기했다. 결국 경제학과의 경우 신임 조교수에게 요구되는 연구역량의 질적 수준까지 참고하겠다는 뜻이다. 이제 나도 내 연구가 질적으로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 거친 상태의 초고는 우선 DSGE를 이용해 이제 막 학계에서 파기(digging) 시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방법론적으로나 잠재적 공헌도 면에서나 가능성이 있긴 있는 셈이다.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말이다. 10월 말까지 현 직장에서 쓰고 있는 공동 보고서를 끝내고 11월 초까지 다른 보고서 하나를 끝내면 12월 말까지 잠시 숨돌릴 틈이 생긴다. 그 기간에 바짝 달려야 한다.

커리어를 생각할 때마다 되새기는 조언이 하나 있다. 저리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면 저기 근처로 가기만 해도 나쁘지 않은 것이라는 말. 반대방향으로만 가지 않는다면, 정확히 그 위치가 아니어도 실패한 인생은 아니지 않냐는 한 선배의 조언.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또 많이 느리고 많이 비틀거리고 있다. 부끄러운 삶이다. 하지만 최소한 반대 방향으로는 가지 않고 있다. 방향이 틀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손해와 희생을 감수해가며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 길의 끝에 기대보다 덜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아직 그 길 위에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