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로 나갈 준비 – 1

월요일 아침이다. 방금 comprehensive oral exam 과 proposal defense 를 위한 모든 서류 작업을 마쳤다. 서류 작업을 마쳤다고 준비가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또 잠을 줄여 가며 논문을 다듬고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 파일도 만들어야 한다. 최소한 다음주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커미티 멤버 교수님들께 완성된 패키지를 드려야 한다. 지금부터 2주동안이 정말 바쁘고 정신없는 시기가 될 것이다.

프로포절 디펜스는 잡마켓에 나가기 전 지도 교수님들께 점검을 받는 자리다. 이 친구가 과연 커미티 멤버들과 학교의 이름을 걸고 잡마켓에 나가서 좋은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을 것인가를 평가받는 자리이고, 때문에 네명이나 되는 교수니들께 집중적인 코멘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디펜스에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고들 하지만, 내가 최초의 실패자로 기록될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름에 컨퍼런스 두 군데에서 초청을 받았다. 하나는 밀라노에서 열리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과 함께 하는 일주일짜리 서머스쿨이고 여기에서 내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다른 하나는 정말 아무 생각없이 넣은 건데 덜컥 되어 버린, 한국에서 7월 중순께 열리는 컨퍼런스다. 이 (별 영양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컨퍼런스에 가기 위해 1500불 남짓한 비행기표를 사야 하나 하는 문제로 오늘 아침에 지도 교수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11월에 우리 학교가 주최하는 거시 컨퍼런스에서 발표할 기회를 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 몇주 사이에 컨퍼런스 일정이 세개나 잡힌 것이다.

대학원생이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한다는 것은 크게 두가지 의미가 있다. 현재 진행중인 박사 논문에 대한 코멘트를 듣고 이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과 잡마켓에 나가기 전 불특정 다수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 잡마켓 프레젠테이션은 내 전공 교수들뿐만 아니라 경제학과에 소속된 모든 교수들이 와서 듣기 때문에 거시 경제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까지 충분히 이해를 시켜야 한다. 지도 교수님과 논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대충 이야기해도 통하는 것이 있다. 척하면 척이랄까. 어짜피 다들 아는 이야기는 스킵하고 모두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약어들을 마음껏 사용할 수도 있고. 하지만 만약 미시나 계량을 전공하는 사람과 내 논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조금 더 일반적인 언어들을 사용해야 한다. (어제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 여름에 한국에 들어오면 부모님을 대상으로 논문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해달라는 말씀 -_- 경제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내 논문의 기본 내용을 이해시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만약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그건 화자의 대화 능력이 그만큼 떨어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결국 한국에 가게 될 것 같다. 물론 학과와 대학원측에 여행 비용 지원을 받아 내야 하지만, 받지 못한다고 가정하면 차를 팔아야 하지만,  그래도 가게 될 것 같고, 가고 싶다. 잡마켓에 나가기 전 연습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그 전까지 논문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좋은 유인을 제공해 주기도 하며, 무엇보다 한국에 있는 교수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네트워킹을 약간이라도 할 수 있는 여지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렇게 조금씩 5년간의 대학원 시절이 끝나 간다. 지금까지는 판을 벌리면서 하나 하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해 나가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뿌린 씨앗들이 쌓아 올린 열매들을 하나 둘 거두어 들이는 시기다. 내가 좋은 거름을 주고 정성껏 돌보았다면 그만큼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달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추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하기 나름이다.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여름 방학을 앞두고 있다.

한국에서 취업을 포기하고 대학원 준비를 하면서 가졌던 생각은 단 하나였다. 5년간의 유예 기간을 얻자. 그 기간동안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실컷 하고 그 다음에 대가를 치루자. 취직을 해서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타 쓰던지 학교에 계속 남아서 학생들을 가르치던지 그건 내가 알바 아니고, 취직대신 공부를 택한 비용은 충분히 지불할테니 제발 조금이라도 머리가 싱싱할 때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충 이런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유예 기간, 자유로운 5년간의 긴 방학의 끝이 보인다. 재밌게 잘 놀았다. 그 결과물은 세편의 논문으로 드러날 것이다. 내가 정말 보람차게 놀았다면 좋은 퀄리티의 논문이 나올 것이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그냥 시간과 돈을 낭비하며 놀았다면 그에 합당한 수준의 논문이 나올 것이고 역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시간은 공평하다.